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영원한 지옥에 보낼 수 있는가. 이것은 무신론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 가장 자주 꺼내는 질문입니다. 유한한 인생의 잘못에 끝없는 형벌을 매기는 신이라면 사랑은커녕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이 반론을 가장 강한 형태로 세워 보겠습니다. 사람이 칠팔십 년을 사는 동안 지은 죄는 아무리 무거워도 유한하다. 그런데 그 유한한 죄에 대해 끝도 없는 고통을 영원히 매긴다면, 형벌이 잘못에 비해 터무니없이 크다. 인간 사회에서도 좀도둑에게 사형을 내리면 폭정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영원한 지옥을 두는 신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폭군이며, 차라리 그런 신은 없는 편이 낫다. 이것이 반론의 핵심입니다.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진지하게 다뤄야 할 지적입니다.
먼저 죄의 무게가 시간의 길이로만 정해지는지 물어야 합니다. 같은 행동도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집니다. 낯선 사람을 모욕하는 것과 자신을 길러 준 부모를 모욕하는 것은 같은 순간에 벌어져도 무게가 다릅니다. 11세기 신학자 안셀무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무한히 존귀하신 하나님을 거스른 죄의 무게는 그 대상의 존귀함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행위에 걸린 시간이 아니라 누구를 거슬렀는가입니다.
다음으로 지옥이 어떤 곳인지 다시 봐야 합니다. 성경이 그리는 지옥은 하나님이 억지로 사람을 끌고 가 가두는 감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원하지 않은 사람의 선택이 마지막에 굳어진 자리에 가깝습니다. 20세기 작가 C. S. 루이스는 지옥의 문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잠겨 있다는 취지로 이 점을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평생의 선택을 하나님이 끝내 존중하실 때, 그 결과가 지옥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거절을 강제로 되돌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정직하게 인정할 것이 있습니다. 지옥의 형벌이 영원히 지속되는지, 아니면 끝내 소멸에 이르는지를 두고는 성경을 똑같이 존중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나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최종 상태가 실재하며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을 지우면 무엇이 남는지 보아야 합니다. 최종 심판이 아예 없다면, 평생 이웃을 죽이고도 벌 받지 않은 학살자와 그 손에 죽은 희생자가 결국 같은 자리에 놓입니다. 악에 대한 마지막 결산이 없는 세계야말로 정의가 무너진 세계입니다. 심판을 말하는 교리는 하나님이 악을 진지하게 여기신다는 증거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의 멸망을 즐기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에스겔 33:11). 심판은 하나님이 앞장서 바라시는 결말이 아니라, 끝까지 돌이키지 않은 자리에서 내려지는 마지못한 결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심판을 경고하는 같은 자리에서 피할 길을 함께 내밉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죄의 무게는 시간이 아니라 거스른 대상으로 정해지고, 지옥은 하나님을 끝내 거부한 선택의 자리이며, 심판이 없는 세계는 정의가 아니라 무질서입니다. 지옥을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이 없는 폭군이 아니라, 악을 진지하게 여기시면서도 돌아올 길을 활짝 열어 두신 분입니다. 그 길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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