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전도부인,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

루카 · 2026.09.10

초기 한국 교회의 복음은 강단에서만 퍼진 것이 아닙니다.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발로, 안방마다 전해졌습니다. 그들을 전도부인이라 불렀습니다. 영어로는 성경을 든 여인, 바이블 우먼입니다.

이 직분이 생긴 데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개항기 조선은 남녀가 한자리에 앉지 못하는 유교 관습이 강했습니다. 남성 선교사는 양반집 안방의 여성에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여성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은 여성이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조선 여성들이 복음의 전달자로 세워졌습니다.

시작은 감리교였습니다. 스크랜튼 부인이 서울 자기 집에서 여성들을 모아 가르치며 전도부인을 길러 냈고, 1888년 무렵부터 이들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초기의 대표적 인물이 이경숙, 세례명 드루실라입니다. 그는 1889년 스크랜튼을 만나 세례를 받고, 곧 선교사와 함께 지방을 돌며 순회 전도에 나섰습니다.

전도부인의 일은 처음엔 성경과 찬송과 전도 문서를 파는 매서인, 곧 책 파는 사람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조선 여성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안방의 여성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성경을 풀어 설명하는 성경 선생이 되었으며, 나아가 교회를 개척하고 기도 모임을 인도하고 성경반과 사경회를 이끌었습니다. 사역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주일 설교까지 감당했습니다. 그 역할은 거의 무제한이었습니다.

몇 사람의 이름은 남아 있습니다. 전삼덕은 양반 부인이라 얼굴을 드러낼 수 없어, 휘장을 사이에 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평양에는 김세지가 있었습니다. 원다비다는 1918년 삼천여 명의 성도 앞에서 설교하며 쪽복음 천칠백오십 권을 팔았고, 김신경은 멀리 제주도로 파송됐습니다. 한 연구는 초기 전도부인의 수를 감리교 칠백여 명, 장로교 이백여 명, 성결교 백여 명 등 천이백여 명으로 집계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름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기록에 오르지 못한 채, 마을에서 마을로, 안방에서 안방으로 복음을 날랐습니다. 교회 성장의 가장 밑바닥에 이 여성들의 발걸음이 있었습니다. 부흥 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문맹 퇴치와 절제 운동, 나라를 위한 운동의 산파 노릇까지 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 스스로 한국 교회가 이 여성들에게 빚을 졌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름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헌신을 지우지는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가복음 14:9). 세상의 기록에서는 지워졌어도, 하나님의 기억에서는 한 사람도 잊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물려받은 교회는,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발걸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 발걸음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이어가야 할 유산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