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토록 조용하신가, 진심으로 찾는 사람에게조차 왜 분명한 증거를 주지 않으시는가. 이것은 오늘 무신론이 내놓는 가장 진지한 물음 가운데 하나이며, 신앙인도 정직하다면 외면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철학자 J. L. 셸런버그는 이 물음을 하나의 논증으로 다듬었습니다. 완전히 사랑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분은 자신을 진심으로 찾는 모든 사람과 인격적 관계를 원하실 것이다. 그런 관계는 최소한 그분이 계시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찾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이런 사람에게 자신을 충분히 드러내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신의 은폐성 논증입니다.
이 물음에는 진짜 무게가 있습니다. 성경 자신이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탄식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숨으시나이까 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니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즉시 응답하지 않으시는 자리의 답답함은 실재하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논증의 첫 전제부터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면 반드시 압도적이고 명백한 증거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가정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을 떠올려 보십시오. 상대를 증거로 굴복시켜 인정하게 만드는 것과, 상대가 자유롭게 응답할 여지를 남기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깊은 사랑입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이름을 새겨 의심을 불가능하게 만드셨다면, 남는 것은 신뢰가 아니라 강요된 인정입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이 찾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을 두시고, 거부하는 자에게는 핑계를 댈 수 없을 만큼의 어둠을 두셨다고 보았습니다.
둘째로, 열린 마음으로 찾는데도 못 믿는 사람이라는 범주는 보기보다 명료하지 않습니다. 불신에는 지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의지와 정서, 삶의 방향이 함께 얽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속을 밖에서 들여다보고 이 사람은 순전히 증거만 없어서 못 믿는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셋째로, 성경은 하나님의 숨으심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하며 그 뜻을 말합니다. 이사야는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이사야 45:15)라고 고백합니다. 증명이 손에 쥐어지지 않는 자리에서 사람은 신뢰로 나아가도록 초청받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하나님이 끝까지 숨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요한복음 1:14). 은폐성 논증이 상정하는, 끝내 침묵하는 신은 애초에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라(마태복음 7:7)고 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조용하심은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강요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 침묵을 근거로 신을 지운 논증은, 정작 그 신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사건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숨어 계시는 듯한 하나님은, 사실 우리를 찾아 먼 길을 달려오신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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