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복판에 아버지의 두 손이 있습니다. 무릎 꿇은 아들의 등에 얹힌 두 손인데, 가만히 보면 서로 다릅니다. 한쪽은 크고 억센 남자의 손이고, 다른 한쪽은 부드러운 여인의 손입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흔히 탕자의 귀향이라 불리는 이 그림에서 가장 깊은 신학은 얼굴이 아니라 이 두 손에 담겨 있습니다.
먼저 사실을 간단히 정리합니다. 렘브란트 판 레인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입니다. 이 작품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668년에서 1669년경에 그린 마지막 시기의 그림이며, 지금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걸려 있습니다. 소재는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아들 비유입니다. 그림을 그릴 무렵 렘브란트는 파산을 겪고 아내와 자녀를 앞세운 뒤였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지친 모습 위에 화가 자신의 만년이 겹쳐 있다는 해석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오래 묵상한 사람으로 헨리 나우웬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두 손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한 손은 붙드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어루만지는 손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안에 아버지의 위엄과 어머니의 품이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아들은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채, 마치 웅크린 태아처럼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그 먼 길과 비참함이 벗겨진 신발 하나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맏아들이 팔짱 낀 채 이 재회를 차갑게 지켜봅니다.
우리는 대개 이 그림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자신을 겹쳐 봅니다. 그러나 나우웬은 그림이 결국 관객을 아버지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고 말합니다. 용서받는 자리에 오래 머물던 사람을, 이제는 달려가 안아 주어야 할 자리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성경의 하나님을 오해 없이 보여 주는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든 눈감아 주는 감상적 관용이 아니라, 붙드는 손과 품는 손이 함께 있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공의와 자비가 한 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를 이렇게 그리셨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누가복음 15:20). 다만 분별할 것도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이라는 해석은 하나님을 성별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하면서도,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야 66:13)고 말합니다. 그 사랑의 온전함을 화가가 두 손으로 드러냈다고 읽는 것이 옳습니다.
기회가 되면 이 그림을 직접 찾아 오래 들여다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스스로 물으십시오. 나는 이 그림 속에서 누구인가. 돌아온 둘째 아들인가, 문밖에 서서 노려보는 맏아들인가, 아니면 이제 달려가 안아야 할 아버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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