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1907년의 일곱 목사와 독노회

루카 · 2026.08.31

1907년은 흔히 평양대부흥의 해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같은 해 가을, 한국 교회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을 맞았습니다. 처음으로 스스로 다스리는 노회를 조직하고, 한국인 목사 일곱 명을 세운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따라가는 이 연재에서, 오늘은 받기만 하던 교회가 스스로 선 그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배경을 먼저 짚겠습니다. 1884년 이 땅에 장로교 선교가 시작된 뒤로, 교회의 살림은 선교사들의 모임인 공의회가 맡아 왔습니다. 강단에 서는 목사도 모두 선교사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세운 목표는 한국인이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전도하며, 스스로 재정을 감당하는 교회였습니다. 이른바 자립과 자전과 자치의 원리입니다.

그 원리가 열매를 맺은 해가 1907년이었습니다. 그해 6월 20일,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첫 졸업생 일곱 명을 배출했습니다.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입니다. 이들은 한국 장로교회가 길러 낸 최초의 목사 후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9월 17일 아침 아홉 시, 평양 장대현교회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네 개의 장로교 선교부가 열다섯 차례나 회합한 끝에 합의를 이루어, 마침내 독립된 노회, 곧 독노회를 조직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선교사 서른세 명과 한국인 총대 서른여섯 명이 참석했습니다. 조직하는 첫 회의부터 한국인 대표가 이미 절반을 넘었다는 사실이 뜻깊습니다. 초대 노회장은 신학교를 세운 마포삼열 선교사가 맡았지만, 부회장을 비롯한 실무는 한국인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노회가 조직된 그날 밤, 같은 예배당에서 일곱 졸업생의 목사 안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엄숙한 예배를 지켜보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목사를 세웠습니다.

독노회가 조직되자마자 한 일들이 이 사건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첫째로 일곱 목사를 세웠고, 둘째로 그 가운데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이제 막 선교사에게서 신앙을 받은 교회가, 같은 날 스스로 선교사를 내보낸 것입니다. 받는 교회에서 보내는 교회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셋째로 전국을 일곱 개 대리회로 나누어 노회의 사무를 처리하게 했는데, 이는 뒷날 총회로 나아가는 제도의 틀을 미리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해 1월 장대현교회 사경회에서 타올랐던 부흥의 불이, 아홉 달 뒤 같은 예배당에서 자립한 교회라는 제도로 결실을 맺은 셈입니다. 부흥은 뜨거운 감정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한국 교회는 그 각성을 스스로 서는 교회로 남겼습니다. 앞서 살펴본 네비우스의 설계, 곧 자립과 자전과 자치의 원리가 이 독노회에서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받은 복음을 품고만 있지 않고 스스로 서서 땅 끝으로 사람을 보낸 교회, 그 첫걸음이 1907년 평양에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어야 할 유산이 바로 그 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