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사경회와 새벽기도, 한국 교회의 습관

루카 · 2026.08.28

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따라가는 이 연재는 오늘 사람이 아니라 습관을 다룹니다. 부흥은 며칠 만에 지나가는 사건이었지만, 사경회와 새벽기도는 그 뒤 백 년을 남았습니다. 어떻게 남았는지가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시작은 1890년 6월이었습니다. 중국 산둥에서 일하던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 선교사가 조선을 방문해 젊은 선교사들에게 자기 선교 원칙을 소개했습니다. 스스로 서고 스스로 전하고 스스로 다스린다는 세 가지 원칙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 현장을 바꾼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던 조항 하나였습니다. 모든 신자가 지도자 아래에서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게 한다는 항목입니다.

이 조항이 사경회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경회는 성경을 살펴 조사하는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일정 기간 한자리에 모여 성경 본문을 집중해 배우는 집회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부흥 집회와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선교사들은 처음에 사랑방에 몇 사람을 모아 성경을 읽는 작은 반부터 시작했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1895년 1월 평양에서 사경회를 열었고, 이 무렵부터 사경회는 지역 교회의 정기 행사가 되어 갑니다.

구조가 중요합니다. 선교사가 조사와 영수라 불리던 한국인 지도자들을 사경회에서 가르치면, 그들이 각자의 마을로 돌아가 다시 사람들을 모아 가르쳤습니다. 배운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구조였습니다. 1893년부터 1901년까지는 전 교인이 함께 참석하다가, 1901년 평양에 정규 신학교가 세워진 뒤로는 지도자 과정과 일반 교인 과정으로 나뉘어 운영됐습니다.

곽안련 선교사는 뒷날 이 제도의 무게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성경공부 제도가 없었다면 네비우스 선교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적었습니다. 선교 정책이 종이 위의 원칙으로 끝나지 않고 교회를 실제로 세운 것은 사경회라는 그릇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새벽기도는 이 사경회 안에서 나왔습니다. 이 대목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와 연구 결과가 갈리므로 나누어 살펴야 합니다.

흔히 알려진 설명은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그것이 이듬해 평양대부흥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 교계 매체가 이 서술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편 이말테가 학술지 신학과 실천 31호에 실은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는 사료를 훨씬 앞으로 밀어 올립니다. 이 논문은 1892년 조사 사경회 이전 백홍준과 마포삼열, 한석진의 새벽기도 사례를 확인하고, 이어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를 비롯해 평안북도 초산, 원산, 평양, 서울 이화학당, 송도의 사경회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습니다. 다만 이것들은 모두 사경회 기간에만 열린 한시적 기도회였습니다. 교회가 미리 광고하고 일반 신도가 모인 정기 새벽기도회로는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두 장로가 장대현교회에서 인도한 모임을 꼽습니다.

이 연구는 또 하나를 바로잡았습니다. 새벽기도가 여성들의 무속적인 새벽 치성에서 왔다는 통설을 사료로 반박하고, 초기 사례가 남성 지도자들에게서 나왔음을 밝혔습니다.

두 설명 중 어느 쪽을 취하든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사경회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배우러 며칠씩 모여 지내는 동안, 날이 밝기 전에 모여 기도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생겼고, 그 시간이 사경회가 끝난 뒤에도 남아 교회의 일상이 된 것입니다. 새벽기도의 뿌리는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성경 공부입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에 남기는 증언입니다. 1907년의 회개는 며칠 사이에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앞뒤로 사람들은 성경을 배우러 모였고 날마다 새벽에 나왔습니다. 부흥이 남은 것은 감격이 컸기 때문이 아니라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장 11절입니다. 날마다라는 한 단어가 이 장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이어야 할 유산은 뜨거웠던 한 주간이 아니라, 그 뒤로 백 년을 이어진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