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최후의 심판, 저울에 오른 사람

루카 · 2026.08.28

한 그림의 정중앙에 저울이 있습니다. 갑옷을 입은 대천사 미카엘이 그 저울을 들고 있고, 한쪽 접시 위에는 벌거벗은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그 저울 하나를 들여다보겠습니다.

한스 멤링의 세 폭 제단화 최후의 심판입니다. 멤링은 1430년경 독일 젤리겐슈타트에서 태어나 브뤼셀에 있던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공방에서 그림을 배웠고, 1460년대 중반 상업 도시 브뤼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작품은 1467년부터 1471년 사이에 그려졌으며, 메디치 은행 브뤼허 지점의 대리인이었던 안젤로 타니가 주문했습니다. 지금은 폴란드 그단스크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멤링은 1494년 8월 11일 브뤼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림의 구성은 단순합니다. 가운데 패널 위쪽에 심판하는 그리스도가 앉아 있고, 그 아래 미카엘이 저울을 들고 서 있습니다. 왼쪽 패널에는 구원받은 이들이 천국으로 향하는 모습이, 오른쪽 패널에는 지옥으로 끌려가는 이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 가는 곳은 위쪽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아래쪽의 저울입니다. 화가가 화면 한가운데에 놓은 것이 재판정도 왕좌도 아닌 계량 기구라는 사실이 이 그림의 성격을 말해 줍니다.

15세기 유럽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삶의 무게를 달아 본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고, 미카엘은 저울을 든 모습으로 자주 그려졌습니다. 문맹률이 높던 시대에 성당의 그림은 글을 대신하는 설교였습니다. 저울에 오른 벌거벗은 사람은 보는 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젠가 저 자리에 서는 것은 당신이다.

여기서 분별할 것이 있습니다. 이 저울 도상은 성경 본문이 아니라 중세 서방교회의 전승입니다. 성경은 심판이 실재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인간의 선행과 악행을 두 접시에 나눠 담아 어느 쪽이 무거운지 재는 장면은 없습니다. 이 그림이 전제하는 것은 무게를 채우면 통과한다는 구조인데,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근거는 행위의 총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성경이 저울을 말한 대목은 오히려 반대 방향입니다.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다니엘 5장 27절, 벨사살 왕의 잔치에 나타난 손가락이 벽에 쓴 글자의 해석입니다. 저울에 달렸을 때 나온 결과는 통과가 아니라 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벨사살 한 사람의 결과가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로마서 3장 20절입니다.

그러니 이 그림 앞에서 우리가 물을 것은 저울추를 어떻게 더 얹을까가 아닙니다. 저울에 달리면 누구나 부족하다는 것이 성경의 결론이고, 복음은 그 부족한 자리에 다른 분의 의가 대신 놓인다는 소식입니다. 멤링의 저울은 우리가 도달할 목표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에서 취할 것이 있습니다. 심판이 실재한다는 감각입니다. 오늘 이 감각은 교회 안에서도 흐릿해졌습니다. 500년 전 브뤼허의 상인은 자기 이름이 언젠가 저울 위에 오른다는 것을 알고 살았습니다. 그 자각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무게를 채우려 했고, 우리는 무게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분을 의지합니다. 심판을 잊은 신앙은 값싸지고, 심판만 남은 신앙은 복음을 잃습니다.

이 작품은 도판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저울 접시 위에 앉은 사람의 표정을 한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저울에 무게를 더 얹으려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대신 달리신 분을 의지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