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네비우스 정책, 스스로 서게 한 설계

루카 · 2026.08.26

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차례로 짚어 온 이 연재는 지난 편에서 최권능의 순교로 2부, 굴하지 않은 신앙을 마쳤습니다. 오늘부터는 3부입니다. 이번에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설계를 다룹니다. 조선에 온 선교사가 아니라, 조선 사람이 스스로 서게 만든 원칙입니다.

1890년의 한국에는 스물몇 살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신학적으로 건전했고 언어 습득도 빨랐지만, 선교 현장에서의 경험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경험 많은 선배가 와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초청받은 사람이 중국에서 삼십 년 넘게 사역해 온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였습니다.

네비우스는 1829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유니언대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파송을 받았습니다. 중국 닝보에서 칠 년을 사역한 뒤 산둥성으로 옮겨 활동하면서, 그동안의 선교 경험을 하나의 이론으로 정리해 두고 있었습니다. 1890년 6월, 조선에 있던 북장로회 선교사 일곱 명이 그를 초청했습니다. 네비우스는 약 두 주간 서울에 머물며 재한 선교사들과 마주 앉아 자신의 방법을 전수했습니다.

그가 전한 원칙은 훗날 세 단어로 요약됩니다. 자립, 자치, 자전. 사실 네비우스 자신은 자립이라는 말만 썼고, 이 세 단어의 정리는 후대 학자의 분류였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분명했습니다. 조선 사람 신자가 생업을 유지하면서 이웃에게 전도하게 할 것, 한국 교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치리 조직을 세울 것, 형편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만 전도자를 채용할 것, 그리고 예배당은 한국 교인이 스스로 지을 것. 선교회의 돈으로 모든 것을 대신 해 주는 방식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 자기 발로 서게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891년, 북장로회 선교회는 이 원칙을 일곱 단, 예순 조에 이르는 규칙으로 만들어 선교부의 공식 내규로 채택했습니다. 그날 이후 조선에 새로 도착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관한 책자를 받았고, 첫해 안에 언어 시험을 통과하는 것과 동시에 이 원리를 완전히 익혔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성경 공부가 모든 사역의 중심에 놓였고, 신자가 되면 곧바로 조직적인 성경공부 모임, 곧 사경회에 참여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습니다.

이 사경회는 훗날 한국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의 자리가 됩니다. 1903년 원산의 부흥과 1907년 평양의 대부흥, 둘 다 사경회 모임에서 시작됐습니다. 스스로 서라고 가르친 그 자리에서,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일어서는 부흥이 함께 일어난 것입니다.

이 정책의 그림자도 짚어야 합니다. 근로계급을 중심에 둔 전도, 지도자의 고등교육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은 한국 교회에 깊은 지성적 신앙보다 감정에 치우친 신앙의 경향을 남겼다는 평가가 학계에 있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 교회가 겪은 혼란과 분열의 한 배경으로 이 지점을 지목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자립을 가르친 정책이 동시에 신학적 훈련의 공백을 남긴 셈입니다. 어느 한쪽만 보면 이 정책은 기적이거나 실수입니다. 둘 다 보아야 온전한 평가가 됩니다.

그럼에도 이 정책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분명합니다.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서양 선교사의 부속 기관이 아니라, 스스로 헌금하고 스스로 전도하고 스스로 다스리는 교회로 자라도록 설계됐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네비우스와 초기 선교사들은 씨를 심고 물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라게 하신 이는 따로 계셨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서 있는 그 자리는, 조선 사람 스스로 감당하게 했던 그 설계 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