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인도양 쓰나미, 2010년 아이티 대지진, 최근에도 이어지는 지진과 홍수 소식마다 같은 질문이 따라옵니다.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죄 없는 아이들이 무너진 건물 아래서, 물에 잠긴 방 안에서 숨을 거두는가. 전쟁이나 범죄라면 가해자의 자유의지를 탓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진판이 움직이고 태풍이 방향을 트는 데는 가해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재해가 신정론에서 특별히 무거운 이유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설명되는 도덕악과 달리, 자연악은 그 설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먼저 정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고난에 즉각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손쉬운 설명을 경계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묻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자기 죄냐 부모의 죄냐. 예수님의 답은 둘 다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특정한 재해나 질병을 특정한 죄에 대한 하늘의 형벌로 지목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배격하신 사고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재해는 어디서 오는가. 로마서 8장은 창조 세계 전체가 허무한 데 굴복해 있으며,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세계가 처음 설계된 그대로가 아니라, 무언가 어긋난 상태에 있다는 성경의 일관된 진단입니다. 자연재해는 하나님이 아이 한 명을 겨냥해 내린 개별적 형벌이 아니라, 깨어진 세계 전체가 안고 있는 고통의 한 표현입니다.
동시에 짚어야 할 역설이 있습니다. 지진과 태풍을 일으키는 바로 그 자연법칙, 판이 움직이고 대기가 순환하는 그 규칙성이 없다면 애초에 안정된 생태계도, 계절도, 생명 자체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을 끓게도 하고 화상을 입히기도 하는 열이 없다면 요리도 난방도 불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세계를 지탱하는 규칙성과 그 규칙성이 때로 낳는 재해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구조입니다. 하나님이 매 순간 자연법칙을 임의로 중단시켜 재해만 막아 주는 세계를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예측 가능한 세계 자체를 요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증도 무너진 집 앞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가 다른 세계관과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이유를 다 설명해 주는 종교가 아니라, 고난 속으로 함께 들어오신 하나님을 말하는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고통과 무관한 자리에서 인간을 내려다보는 방관자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가장 부당한 고난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자연재해로 자녀를 잃은 부모의 눈물은, 하나님께 낯선 감정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지금의 고통이 마지막 장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지금의 고통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고 말할 뿐입니다.
우리가 자연재해 앞에서 할 수 있는 정직한 답은 두 가지입니다. 왜냐고 다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 그리고 고난 속에 있는 사람 곁에 실제로 서는 것입니다. 신학적 답변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함께 우는 이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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