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차례로 짚어 온 이 연재는 어제 1938년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을 다뤘습니다.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고 결의한 그 이듬해, 한 평신도가 일본 제국의회 회의장 한복판에 종이 뭉치를 던졌습니다. 평안북도 영변 출신의 한의사 박관준 장로입니다.
박관준은 1875년 영변에서 태어났습니다. 한방의를 배워 1917년 4월 조선 의생 면허를 받았고, 여러 곳에서 개업하다가 1935년 평양 선교정에 십자의원을 열었습니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은 장로였고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목회자도 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 문제에 매달리게 된 계기는 신문 기사 한 건이었습니다. 1937년, 평양의 세 학교인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숭의여중학교가 신사에 참배하지 않아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다는 보도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개인의 신앙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무너지는 문제로 봤습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진정서를 써서 니시모토 평안남도지사와 미나미 지로 총독에게 보냈습니다. 조선총독부를 열세 번 찾아가 신사참배 강요를 거두라고 권했습니다. 폭력도 비밀 조직도 없었습니다. 문서와 방문,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39년 초, 그는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선천 보성학교 교사직을 그만둔 안이숙, 도쿄에서 공부하던 아들 박영창이 함께했습니다. 세 사람은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닛비키 신스케, 우가키 가즈시게, 아베 이소오 같은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진정서를 내밀고 조선 교회의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이 역시 소용이 없었습니다.
남은 길은 하나였습니다. 의회에 직접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종교 단체를 국가가 통제하기 위한 법안이 심의되는 날짜를 골랐습니다. 1939년 3월 24일, 중의원 회의장에 들어갔습니다. 법안 심의가 진행되던 중 미리 준비한 건의서를 단상을 향해 던지며 외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이다.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그는 그 자리에서 붙잡혔습니다. 경시청에 서른두 날 갇혔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이어 가다 다시 검속됐습니다. 그리고 6년의 옥고 끝에 평양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1945년, 광복을 보지 못한 해였습니다. 정부는 1991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이 사건은 아무것도 막지 못했습니다. 법안도 막지 못했고 신사참배 강요도 계속됐으며 그는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성과로만 따지면 실패입니다. 그러나 기록은 남았습니다. 조선 교회 전체가 굴복한 것은 아니라는 기록, 총회의 결의가 조선 그리스도인 모두의 뜻은 아니었다는 기록입니다. 어제 다룬 총회의 가결과 오늘의 이 사건은 같은 시기의 일입니다. 한쪽만 보면 한국 교회사는 배교의 기록이 되고, 다른 쪽만 보면 미화가 됩니다. 둘 다 있었다고 말할 때에야 증언이 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28). 박관준이 던진 것은 종이 한 장이었지만 그가 건 것은 목숨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어야 할 유산은 던지는 용기가 아니라, 아무도 듣지 않을 때에도 옳은 말을 계속하는 끈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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