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총회는 왜 신사참배를 가결했는가

루카 · 2026.08.22

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차례로 짚어 온 이 연재는 오늘 인물이 아니라 한 회의 앞에 섭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입니다. 한국 장로교가 스스로 신사참배를 가결한 날이며, 이 연재에서 가장 쓰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신사참배 강요는 학교에서 먼저 시작됐습니다. 공립학교를 거쳐 기독교계 사립학교로, 다시 교회로 옮겨 왔습니다. 총회가 열리기 전에 이미 국내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상태였습니다. 평북노회는 1938년 2월에, 전북노회는 6월 8일 정기노회에서, 경북노회는 8월 19일 임시노회에서 가결했습니다.

반대에 앞장선 목회자들은 총회 전에 이미 붙잡혀 있었습니다.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채정민 같은 이름이 그때 감옥에 있었습니다. 반대할 사람을 미리 치워 놓고 회의를 연 것입니다.

총회는 9월 9일 오후 8시 개회예배로 시작했습니다. 만주 지역 4개 노회를 포함한 27개 노회에서 총대 193명이 모였습니다. 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이었습니다. 첫날 임원 선거에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총회장으로 뽑혔습니다.

이튿날 아침 회의장의 공기는 회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안남도지사와 경찰부장, 고등과장, 평양경찰서장 등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일반 방청은 금지됐습니다. 정복 경관이 문밖을 지켰고, 사복 형사들이 총대들 사이에 끼어 앉았습니다.

순서는 미리 짜여 있었습니다.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가 평양·평서·안주 세 노회 연합대표 자격으로 신사참배 결의와 성명서 발표를 제안했습니다.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가 동의했고, 안주노회 길인섭 목사가 재청했습니다. 토의 절차는 없었습니다.

홍택기 총회장이 가하면 예라고 답하라고 물었습니다. 열 명 남짓이 대답했습니다. 나머지는 침묵했습니다. 그는 부(否)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가결을 선포했습니다. 방위량 선교사가 일어나 아니라고 외쳤지만 일본 형사에게 곧바로 제지당했습니다.

이어 발표된 성명서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으며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의식이라는 것, 그러므로 앞장서 실행하고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겠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회의는 정오에 정회했습니다.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와 각 노회장들이 총회를 대표해 평양신사로 갔습니다. 참배하고 돌아와 오후 2시에 회의를 이어 갔습니다.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이 9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실렸습니다.

무엇을 잃었는지는 곧 드러났습니다. 그해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닫았습니다. 결의를 따르지 않은 성도들은 감옥으로 갔습니다. 총회가 앞장선 그 자리에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교단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이 대목에서 변호할 것은 없습니다. 경찰의 강압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의는 총회의 이름으로 이뤄졌고, 성명서에는 총회장의 이름이 적혔습니다. 강요가 있었다는 사실이 배교가 아니었다는 뜻은 되지 못합니다. 교회가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면 결의문 한 장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1938년 9월 10일이 남긴 기록입니다.

취소는 16년 뒤에 왔습니다. 1954년 4월 경북 안동에서 열린 제39회 총회에서 권연호 목사의 제안으로 제27회 총회의 결의가 불법으로 취소됐습니다. 그때 총회장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른 이원영 목사였습니다. 총회는 회개의 성찬과 특별기도회를 열었고, 순교자 유가족을 돕는 헌금을 실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우리가 물려받아야 할 것은 미화된 과거가 아니라 정확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요한계시록 2:5). 넘어진 자리를 정확히 아는 교회만이 다시 그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