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거짓 자백서에 서명합니다.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재판관이 그 종이를 교회 문에 붙여 마을 사람들에게 보이겠다고 하자, 그는 서류를 빼앗아 찢어 버립니다. 아서 밀러의 희곡 「시련」 마지막 막의 장면입니다.
작품 정보부터 정리합니다. 「시련」은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가 쓴 4막 희곡으로, 1953년 1월 22일 뉴욕 마틴 벡 극장에서 초연됐습니다. 소재는 1692년 매사추세츠 세일럼에서 벌어진 마녀재판입니다. 이 재판으로 200명 넘는 사람이 고발됐고, 19명이 교수형을 당했으며, 최소 5명이 옥사했습니다. 재판받기를 거부한 자일스 코리는 돌에 눌려 죽었습니다.
주인공 존 프록터는 실존했던 농부이며, 재판 끝에 처형된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극에서 그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순합니다. 마녀와 손잡았다고 자백하면 산다. 자백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는 한 번 무너집니다. 종이에 이름을 씁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왜 서명한 종이를 붙여야 하느냐고 그가 묻습니다. 자백은 이미 했는데 왜 그것을 마을 전체가 봐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저항은 목숨의 문제에서 이름의 문제로 옮겨 갑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돌려 달라고 절규하고, 종이를 찢고, 교수대로 갑니다.
이 장면이 오늘 우리에게 날카로운 이유가 있습니다. 서명은 언제나 작아 보입니다. 종이 한 장, 절 한 번, 침묵 한 번입니다. 권력은 마음까지 요구하지 않습니다. 형식만 갖추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형식이 공개되는 순간, 그것은 나 한 사람의 타협이 아니라 남들 앞에 걸리는 증언이 됩니다. 1938년 한국 장로교 총회가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성명서에 총회장의 이름을 적었을 때 벌어진 일도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판단 기준은 여기서 분명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태복음 10:32). 신앙은 내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걸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프록터가 마지막에 지키려 한 것도 평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이름이 무엇을 말하는가였습니다.
다만 분별할 것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역사극이 아니라 각색입니다. 실제 인물들의 나이와 관계는 극의 필요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또 밀러는 이 극을 1950년대 미국의 공산주의자 색출 국면에 대한 은유로 썼고, 그렇게 읽히기를 의도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나눠 봐야 합니다. 공산 전체주의의 위협은 실재했고 그것을 경계한 일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증거 없는 고발과 강요된 자백이라는 방법은 어느 대의로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이 겨눈 것은 뒤쪽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세일럼 재판은 교회 지도자와 사법 권력이 뒤엉켜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사건입니다. 이것은 변호할 일이 아니라 회개할 지점입니다. 동시에 이 작품을 종교의 광기 이야기로만 읽으면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프록터를 끝까지 붙든 힘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할 수 없다는 확신이었습니다.
한 번쯤 4막만이라도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내 손에 놓인 서명은 무엇이며, 그것이 벽에 붙어 공개된다면 나는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