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차례로 짚어 온 이 연재는 오늘 열여덟에 세상을 떠난 한 학생에게 이릅니다. 유관순(1902~1920)입니다. 그가 감옥에서 보낸 마지막 1년 6개월은 나라의 역사인 동시에 한 교회 소녀의 신앙 이력이었습니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군 지령리, 지금의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일찍부터 감리교 신자였습니다. 작은아버지 유중무가 전도사로 이끌던 지령리교회, 오늘의 매봉교회가 그가 자란 신앙의 자리였습니다.
이 마을을 순회하던 감리교 여선교사 앨리스 해먼드 샤프가 그를 눈여겨보았습니다. 1900년에 내한해 한국 이름을 사애리시라 쓰던 사람입니다. 사애리시는 유관순을 공주로 데려가 영명학교에서 공부하게 했고, 이어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에 교비생으로 편입시켰습니다. 교비생은 학비를 면제받고 졸업 후 교사로 일하는 장학생을 말합니다. 서울에서 그는 주일마다 정동교회에 나갔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은 그가 이곳에서 손정도, 이필주 목사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정리합니다. 이필주는 뒷날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이화학당 학생들도 거리로 나갔습니다. 유관순은 3월 1일과 3월 5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혔으나 곧 풀려났습니다. 일제가 전국에 휴교령을 내리자 그는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 본 것을 전하고 독립선언서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4월 1일 병천 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수천 명이 모인 그 자리에서 열아홉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주동자로 체포된 그는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으로 감형됐습니다. 함께 재판받은 이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그는 상고하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재판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열일곱 살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도 그는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1920년 3월 1일 오후 두 시, 만세운동 1주년에 맞춰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옥중 만세를 불렀습니다. 감방 벽을 두드려 신호를 돌린 뒤 여옥사에서 시작된 함성이 형무소 전체로 번졌습니다. 그 대가로 심한 고문이 뒤따랐습니다. 그해 4월 28일 특사령으로 형기가 1년 6개월로 줄었지만, 그는 출소를 앞두고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랜 고문과 영양실조 때문이었습니다. 열여덟이었습니다.
형무소는 시신 인도를 거부했습니다. 이화학당 교장 월터가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항의하자, 일제는 해외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치른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넘겼습니다. 10월 12일 유해가 학교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았습니다. 10월 14일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가 치러졌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습니다. 그 묘는 1930년대 일제의 개발 과정에서 잃어버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유관순은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직분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교회에서 배운 것과 학교에서 배운 것,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하겠다는 결심뿐이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세운 학교와 교회가 무엇을 길러 냈는지는 그 결심이 증언합니다. 선교사가 데려간 소녀가 열여덟에 감옥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그 교육이 순종적인 신자를 만드는 교육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디모데전서 4:12). 우리가 이어야 할 유산은 어린 신자를 아직 이르다고 미뤄 두지 않는 교회, 배운 것을 살아 내도록 밀어 주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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