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로빈슨 크루소, 무릎을 꿇은 자리

루카 · 2026.08.20

무인도에 표류한 사내가 열병에 걸려 앓아눕습니다. 약을 챙겨 먹은 뒤 그는 난파선에서 건져 온 성경을 아무렇게나 펼칩니다. 눈에 들어온 구절은 시편 50편 15절이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로빈슨 크루소가 그 섬에서 처음으로 무릎을 꿇은 장면입니다. 자립의 교과서처럼 읽혀 온 이 소설의 실제 중심축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1719년 4월 25일 런던에서 초판이 나왔습니다. 넉 달 만에 네 차례 인쇄를 거듭할 만큼 반응이 컸고, 같은 해 8월에 2부가 붙었으며 이듬해에는 작가 해설 격의 후속편까지 나왔습니다. 예순 무렵의 늦깎이 작가가 단숨에 이름을 얻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흔히 인간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로 소개됩니다. 크루소는 표류한 섬에서 울타리를 세우고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굽습니다. 맨손으로 문명을 재건하는 사람의 기록처럼 읽힙니다.

그런데 소설의 방향이 바뀌는 지점은 그가 무언가를 더 잘 만들어 냈을 때가 아닙니다. 열병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을 때입니다. 손이 멈춘 자리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만들지 않은 것을 붙잡습니다. 성경을 펼치고,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일을 합니다. 기도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순서입니다. 그는 자립에 실패해서 신앙으로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심 이후에 그의 노동은 더 성실해집니다. 달라진 것은 노동의 양이 아니라 노동의 근거였습니다. 이전에는 살아남기 위해 일했고, 이후에는 살려 두신 이유를 찾으며 일했습니다.

오늘 이 장면이 우리를 찌르는 지점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크루소의 전반부처럼 삽니다. 버티는 힘을 늘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그것이 통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찾을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다 병이 나거나 일이 끊기거나 관계가 무너지면, 비로소 내가 세운 울타리가 나를 지켜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자립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제 손으로 일하라고 분명히 명령합니다. 다만 자립을 최종 목적지로 두지 않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 가지가 스스로 굵어지는 일과 나무에 붙어 있는 일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붙어 있어야 굵어집니다.

한 가지 분별할 것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세기 유럽인의 시선을 그대로 담고 있어, 다른 문화권 사람들을 다루는 대목에서 오늘의 기준으로는 불편한 서술이 나옵니다. 그 한계를 감추지 않고 읽는 편이 정직합니다. 작품의 성취와 시대의 한계는 함께 놓고 봐야 합니다.

기왕 읽으신다면 축약본이 아닌 완역본으로, 특히 섬에서의 첫해 기록을 천천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내가 세운 울타리입니까, 아니면 나를 세우신 분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