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차례로 짚어 온 이 연재는 오늘 평양 산정현교회의 한 장로에게 이릅니다. 조만식(1883~1950)입니다. 그는 강단이 아니라 시장과 상점에서 자기 신앙을 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조만식은 1908년 숭실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들어갔습니다. 유학 중에는 백남훈, 김정식과 함께 도쿄에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나뉘어 예배하던 것을 하나로 합쳐 조선인 연합교회를 세웠습니다. 인도의 간디가 내세운 무저항주의를 접하고 이를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습니다.
1913년 졸업하고 돌아온 그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앞서 다룬 남강 이승훈이 세운 그 학교입니다. 2년 뒤인 1915년에는 교장이 되었습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1년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가 되었고, 같은 시기 산정현교회 장로로 세워졌습니다.
그가 택한 싸움의 방식은 경제였습니다. 1920년 8월, 평양 야소교서원에 조만식과 오윤선, 김동원 등 70명이 모여 조선물산장려회를 발기했습니다. 야소교서원은 기독교 서적을 취급하던 평양의 서점입니다. 이들은 조선이 가난해진 직접적인 원인을 제 나라에서 만든 물건으로 살아가지 않는 데서 찾았습니다. 부득이한 물품을 빼고는 철저히 자작자급을 실행하고, 한 걸음 나아가 상공업을 직접 일으키자는 취지였습니다. 그해 12월 평양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첫 선전강연회가 열렸습니다.
평양 조선물산장려회는 1922년 5월 16일 발기인 총회를 다시 열고, 6월 20일 정식으로 창립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가 표어를 공모했고, 12월 25일 당선작이 발표됐습니다. "내 살림 내 것으로"와 "조선 사람 조선 것"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운동은 1923년 1월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에서 전국 조직으로 이어졌습니다.
실행 조건은 막연한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입고 여자는 검정 물감을 들인 무명 치마를 입는다, 설탕과 소금과 과일과 음료를 뺀 음식물은 우리 것을 사서 쓴다, 일상용품은 토산품을 쓰되 부득이하게 외국 물건을 쓸 때는 실용품으로 최대한 절약한다. 자기 옷장과 밥상에서 시작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성과는 크지 않았습니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고 조직도 약했습니다. 열기는 1923년 여름을 지나며 식었고, 이듬해 조선물산장려회는 사무실 임대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이 선 자리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1938년 2월 산정현교회 담임이자 그의 오산학교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가 수감되고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강요가 이어지자, 그는 1939년 10월 김동원, 오윤선 등과 함께 장로직을 사퇴했습니다. 교회는 이듬해 3월 폐쇄됐습니다. 1940년 일제가 국민총력조선연맹 평남지부 고문 자리를 제의했을 때 그는 거절했고, 1943년 지원병제 협조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그는 평양에 남았습니다.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을 세웠고, 1946년 1월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다가 소련 군정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됐습니다. 다시 자유를 얻지 못한 채 195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증언은 이것입니다.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남의 힘에 기대어 얻은 것은 언제든 도로 빼앗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명 치마 한 벌과 토산 그릇 하나로 시작한 그의 저항은, 믿는 사람이 자기 살림에서부터 책임을 지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로새서 3:23). 우리가 이어받을 유산은, 신앙을 생활의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실행하는 정직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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