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죽은 시인의 사회, 무엇을 향해 서는가

루카 · 2026.08.18

학생들이 책상 위로 올라서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어 교사 존 키팅은 세상을 늘 보던 각도에서만 보지 말라며 아이들을 교탁 위에 세웁니다. 눈높이가 한 뼘 달라졌을 뿐인데 교실이 다르게 보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장면이고, 오늘 다루려는 것도 이 한 장면입니다.

1989년에 나온 이 영화는 피터 위어가 연출하고 톰 슐만이 각본을 썼습니다. 슐만은 이 각본으로 제62회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배경은 1959년 미국의 남자 사립학교 웰튼 아카데미입니다. 전통과 명예, 규율과 최고를 내건 학교이고, 학생들의 진로는 대개 입학 전에 부모가 정해 놓은 상태입니다.

키팅은 그 질서에 다른 언어를 들여옵니다. 라틴어에서 온 말 하나를 아이들에게 건네는데, 오늘을 붙잡으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입니다. 인생은 유한하니 지금 이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말 자체는 성경과 멀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인생이 짧고 안개 같다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시편 90편도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쳐 달라고 구합니다. 유한함을 직시하라는 요구는 기독교가 오래 해 온 말입니다. 이 영화가 관객을 흔드는 힘도 여기서 나옵니다.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삶에 대해 정직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그 성취를 축소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다음 문장이 비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는 분명히 말하지만, 무엇을 향해 서야 하는지는 답하지 않습니다. 억압하는 권위에서 풀려나 자기 자신이 되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최종 기준이 되면 그 기준을 지탱해 줄 근거가 자기 자신 말고는 남지 않습니다. 영화 후반에 벌어지는 비극은 그 공백이 어떤 무게인지를 보여 줍니다. 자유를 얻은 자리에서 그 자유를 어디에 쓸지 말해 주는 목소리가 없으면, 사람은 그 무게를 혼자 감당해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 지점에서 다르게 답합니다. 권위 자체가 악이 아니라 사람을 도구로 쓰는 권위가 악입니다. 그리고 자유는 기준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옳은 것을 향해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입니다. 전도서는 유한함을 말한 뒤 그냥 끝내지 않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도서 12:1). 오늘을 붙잡으라는 말 다음에 붙잡을 대상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카르페 디엠은 여기까지 와야 완성됩니다.

이 영화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후배를 두고 일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볼 만합니다. 다만 보고 난 뒤 한 가지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라고만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을 향해 서라고 말해 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