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 오늘은 지난 편에서 이름만 스쳐 간 한 사람의 앞선 시기로 돌아갑니다. 1907년 12월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오산에서 학생 일곱 명과 교사 두 명으로 학교 하나가 문을 열었습니다. 세운 사람은 마흔셋의 상인 이승훈이었습니다.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놋그릇 가게의 일꾼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십여 년 동안 놋그릇을 지고 다니며 장사했고, 나중에는 공장을 경영해 서북 지방에서 손꼽히는 실업가가 됐습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으로 사업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전환점은 1907년 7월이었습니다. 평양에서 안창호의 교육진흥론 강연을 들은 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강연 뒤 그가 개인의 영달보다 민족을 구하는 일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금연과 금주, 단발을 그 자리에서 실행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했습니다.
용동으로 돌아온 그가 처음 한 일은 서당을 개편해 강명의숙이라는 신식 학교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아이들부터 가르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중등 과정의 오산학교를 열고 스스로 교장이 됐습니다. 서북 지방에서 처음 세워진 사립 중학교였습니다. 가르친 과목은 수신과 역사, 지리, 영어, 산술, 물리, 천문학 등이었습니다.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교육이 먼저라는 생각, 곧 교육구국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1909년 오산학교는 정식 인가를 받았고 그 무렵부터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 교육의 틀을 갖춰 갔습니다. 이광수와 조만식이 교사로 거쳐 갔고, 뒷날 백병원을 세운 의사 백인제가 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학교가 자리를 잡던 무렵 나라가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사건을 만들어 냈습니다. 105인 사건입니다. 표적은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과 신민회였습니다. 전국에서 600여 명이 검거됐고 122명이 기소됐으며 105명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근거는 고문으로 받아 낸 자백이었습니다.
조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과 미국의 선교 본부들이 이 사건을 국제 사회에 알렸고, 항소심에서 105명 가운데 99명이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끝까지 유죄가 남은 사람은 여섯 명이었습니다.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임치정, 옥관빈, 그리고 이승훈이었습니다. 그는 1915년에야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풀려난 뒤의 선택이 이 사람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쉰이 넘은 나이에 그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목회자가 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 일에 다시 전념하기 위해 공부를 중단했고, 자신이 세운 정주 오산교회의 장로로 남아 평신도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1919년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기독교 대표로 참여해 다시 감옥에 갔습니다. 일제는 오산학교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지목해 교사를 불태우고 학교를 없앴습니다. 출감한 그는 학교를 다시 세웠습니다.
1930년 5월 제자들이 학교 뜰에 그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순일곱이었습니다. 남긴 말은 자기 유해를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공부에 쓰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그 유언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학교 하나를 세웠고, 그 학교에서 나온 사람들이 다음 세대를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디모데후서 2:2). 믿음은 지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르쳐 넘길 때 이어집니다. 오산에서 시작된 일곱 명이 그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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