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LOGETICS

아이에게 신앙을 가르치면 학대인가

루카 · 2026.08.18

자녀에게 종교를 가르치는 것은 아동 학대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무신론 진영에서 나온 이 주장은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논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주장을 가장 강한 형태로 세워 놓고 답해 보려 합니다.

주장은 이렇게 전개됩니다. 우리는 무슬림 아이, 기독교인 아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그런데 아이에게는 이슬람이나 기독교의 진리 주장을 검토할 능력이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슬림 부모의 아이, 기독교인 부모의 아이일 뿐입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2006)에서 정리한 논지가 이것입니다. 검증할 수 없는 교리를 판단 능력이 없는 정신에 새겨 넣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각인이며, 지옥에 대한 공포까지 동원된다면 정신적 해악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중립적으로 키우고 성인이 되었을 때 스스로 고르게 하라는 결론이 따라옵니다.

먼저 인정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공포로 아이를 통제한 종교 교육은 실제로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아이가 학대당한 사건, 그리고 그것이 오래 은폐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교회가 변호하면 변증은 그 순간 설득력을 잃습니다. 이것은 반박할 대상이 아니라 회개할 지점입니다.

그러나 주장의 핵심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드러납니다.

첫째, 중립적인 양육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진공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사람은 왜 존엄한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부모는 말하지 않아도 태도로 가르칩니다. 종교를 말하지 않는 가정은 그 질문이 유보해도 되는 문제라는 답을 이미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속적 자연주의도 하나의 세계관이며, 그것 역시 전수됩니다. 선택지는 세계관을 가르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세계관을 가르칠 것인가입니다.

둘째, 이름표 논증은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한국인이라 부르고, 채식하는 가정에서 채식을 가르치며, 특정한 정치적 가치를 가진 가정에서 그 가치를 물려줍니다. 아무도 이것을 학대라 부르지 않습니다. 종교만 예외로 삼으려면 종교가 거짓이라는 전제가 먼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전제야말로 논증되어야 할 결론입니다. 결론을 전제로 끌어다 쓰는 순환이 이 주장의 약한 고리입니다.

셋째, 학대는 실제 해악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어떤 믿음이 틀렸다는 주장과 그 믿음을 가르치는 행위가 학대라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뒤쪽은 자료로 입증해야 하는데, 종교적 양육 일반이 아동에게 해를 끼친다는 결론은 확립돼 있지 않습니다. 학대는 강압과 폭력이 있을 때 성립하며, 그 기준은 종교 가정과 비종교 가정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넷째, 성경이 명령하는 교육 방식 자체가 강압이 아닙니다. 신명기 6장은 자녀가 이 규례가 무슨 뜻이냐고 물을 때 부모가 답하는 장면을 전제합니다. 질문이 허용되는 구조입니다. 바울은 더 분명하게 못 박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자녀를 억누르지 말라는 경계가 성경 안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중립적 양육은 없으므로 질문은 가르칠지 여부가 아니라 무엇을 가르칠지입니다. 종교만 학대로 지목하려면 종교가 거짓임을 먼저 증명해야 하는데 그 증명이 선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강압이 아니라 질문에 답하는 방식의 교육을 명령합니다. 자녀에게 믿음을 전하는 일은 감출 일이 아니라 가장 정직하게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