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를 기념하는 자리가 순교자를 위한 자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에는 죽은 목사들을 추모하는 대규모 행사가 등장하는데, 그 행사를 기획하는 사람의 목적은 추모가 아닙니다. 광복절에 이 대목을 다시 읽을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순교자』는 김은국이 영문으로 써서 1964년 미국에서 발표한 장편소설입니다. 원제는 The Martyred이며, 뉴욕의 조지 브래질러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국내에는 1965년 장왕록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됐고, 뒤에 저자 자신이 옮긴 판본과 도정일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작가는 193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6·25 때 군에 복무했고, 그 경험이 작품의 바탕이 됐습니다.
이야기는 국군이 평양을 되찾은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육군 정보 계통에 배속된 이 대위가 전쟁 중 평양에서 목사 열두 명이 처형된 사건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조사를 이어 가면서 그가 마주하는 것은 사건의 경위만이 아닙니다. 순교란 무엇이며 그 죽음이 무엇을 증명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상관인 장 대령이 보는 각도는 다릅니다. 그는 공산 정권에 희생된 열두 사람을 위한 추모식을 크게 열려 합니다. 목적은 분명합니다. 평양의 신자들과 시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과 정신적 승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죽음이 선전의 재료가 되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짚어야 합니다. 공산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를 지키는 일 자체는 옳습니다. 열두 사람을 죽인 쪽이 어디인지도 분명합니다. 문제는 목적이 아니라 취급 방식입니다. 신앙 때문에 죽은 사람의 죽음을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자료로 환산하는 순간, 그 죽음이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가 지워집니다. 그들은 체제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구분을 언어 자체에 담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여기서 증인으로 옮겨진 헬라어 마르튀스가 순교자라는 말의 어원입니다. 순교자는 본래 무엇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증언한 사람입니다. 증언의 대상이 바뀌면 그것은 더 이상 순교가 아닙니다.
이 작품을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발표 당시 미국 신학계에 퍼져 있던 흐름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응답 없음을 전제하고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쪽으로 답을 찾아간다는 평가가 따라붙습니다. 질문은 정확하지만 답은 성경과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시간의 끝에 부활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위로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신앙의 근거입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읽을 값이 있습니다. 신앙이 정치의 언어로 번역될 때 무엇이 사라지는지를 이만큼 집요하게 보여 주는 한국계 작가의 작품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광복절과 각종 기념 예배가 이어지는 이 계절에 스스로 물어볼 질문 하나를 남깁니다. 우리가 순교자를 기억할 때, 우리는 그들이 증언한 분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편이 옳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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