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말은 자화자찬이며, 실제로 교회는 일제에 굴복했다는 것입니다. 근거로 제시되는 사실은 강력합니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스스로 가결했고, 총대들은 다음 날 평양신사에 가서 절했습니다. 교단이 공식 기구의 이름으로 우상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저항의 역사를 말할 자격이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먼저 인정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사실은 변호할 수 없습니다. 1938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총회는 신사참배를 종교 의식이 아니라 국가 의식이라고 규정하며 통과시켰습니다. 회의장에는 경찰이 들어와 있었고 총회장은 반대 여부를 묻지 않은 채 가결을 선언했습니다. 압력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배교를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실패이고 회개해야 할 지점입니다.
교회 자신이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1945년 9월 해방 직후 장로교회 재건을 논의하면서 제시된 원칙의 첫 항목은 지도자들이 모두 신사에 참배했으므로 권징의 절차를 거쳐 통회한 뒤 사역에 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잘못을 지운 것이 아니라 절차를 만들려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논증이 끝나면 사실의 절반만 남습니다. 같은 시기에 반대 방향의 기록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총회 결의를 거부한 결과로 문을 닫은 교회가 200여 곳, 투옥된 신자가 2천여 명, 그 가운데 순교한 교역자가 50여 명이었습니다.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안북도의 이기선, 경상남도의 한상동처럼 이름과 지역이 특정되는 저항이었고, 1945년 8월 17일 평양 감옥에서 출옥한 이들의 명단도 남아 있습니다.
3·1운동의 통계는 더 앞선 시기를 보여 줍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분석한 일제 측 자료에서 3·1운동 피검자 중 종교를 밝힌 5,990명 가운데 개신교인이 3,065명으로 51.2%였습니다. 당시 개신교인은 전체 인구의 1~1.5%였습니다.
그래서 답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제도로서의 교단은 굴복했고, 신자들의 상당수는 값을 치렀습니다. 이 둘은 같은 저울에 올려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없습니다. 교단의 결의를 근거로 신자들의 감옥을 지우는 것도, 신자들의 순교를 근거로 교단의 배교를 덮는 것도 사실을 다루는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지점에서 교회에 유리한 쪽을 편들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언 28:13). 덮은 죄는 형통하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교회가 스스로의 실패를 먼저 말할 때에만 순교의 역사도 신뢰를 얻습니다.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은 교회의 실패이며 변호 대상이 아닙니다. 동시에 200여 교회의 폐문과 2천여 명의 투옥, 50여 명의 순교는 기록으로 남은 저항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함께 말하는 것이 교회를 낮추는 일이 아니라, 교회가 진리를 사실보다 앞세우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은 교회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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