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당 꼭대기에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한 청년이 그 아래 서서 올려다봅니다. 저기까지는 손이 닿지 않고,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윤동주가 남긴 십자가라는 제목의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시가 묻는 것은 하나입니다. 십자가는 올려다보는 것인가, 지는 것인가.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동촌은 기독교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명동교회 장로였습니다.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숭실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가 거쳐 온 학교는 모두 기독교 계열이었습니다.
그는 1941년 연희전문을 마치며 시 열아홉 편을 묶어 시집을 내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습니다. 원고 세 부를 손으로 옮겨 적어 한 부는 자신이 갖고, 한 부는 스승 이양하에게,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맡겼습니다. 남은 것은 정병욱이 보관한 원고뿐이었습니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3년 7월 그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었고,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물일곱이었습니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나왔습니다. 유고 서른한 편이 실렸고 정지용이 서문을 썼습니다. 십자가는 그 서른한 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의 중심은 첨탑이 아니라 거리입니다. 십자가가 걸린 곳은 높고, 서 있는 자리는 낮습니다. 종소리가 들리면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되지만 종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제도로서의 종교가 답을 주지 못하는 시대였다는 뜻입니다. 그때 이 시의 화자는 종소리를 기다리기를 그만두고, 자기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지겠다고 말합니다. 신앙을 보는 자리에서 지는 자리로 옮기는 전환입니다.
여기서 분별할 것이 있습니다. 이 시를 순교의 예언으로만 읽으면 시도 신앙도 얕아집니다. 실제로 그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결말을 먼저 알고 읽으면, 시가 예언서처럼 보이고 시인은 성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 시가 다루는 것은 결말이 아니라 부끄러움입니다. 아직 아무 값도 치르지 않은 사람이 자기 자리를 정직하게 본 기록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구원을 이룬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뿐입니다. 사람이 지는 십자가는 그 구원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따라가는 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 9:23). 날마다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한 번의 영웅적 결단이 아니라 매일의 순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신앙의 절정이 아니라 출발선에 대한 시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오늘 자기 몫을 지는 자리가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광복절을 앞둔 이 주간에 이 시집을 한 번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십자가를 올려다보고 있는가, 지고 있는가. 지금 내가 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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