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따라온 이 연재가 오늘 1919년으로 들어갑니다. 3·1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인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개신교인이 인구에서 차지한 비율은 1~1.5% 수준이었습니다.
33인의 구성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이었습니다. 기독교 16인은 장로교 7명과 감리교 9명으로 나뉩니다. 길선주, 이승훈,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이명룡, 이갑성이 장로교 쪽이었고, 이필주, 박희도, 신홍식, 신석구, 오화영, 김창준, 박동완, 최성모, 정춘수가 감리교 쪽이었습니다.
이 연합을 만든 사람은 정주의 이승훈입니다. 그는 평안도 장로교 인사들의 동의를 먼저 모은 뒤 서울로 올라와 천도교를 대표한 최린과 만나 함께 추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이 합의를 기점으로 기독교와 천도교 중심의 준비가 본격화됐다고 기록합니다. 그가 세운 오산학교와 105인 사건으로 겪은 옥고가 그 신뢰의 바탕이었습니다.
기독교 측이 최종적으로 뜻을 모은 것은 2월 27일이었습니다. 장소는 서울 정동의 이필주 목사 집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등이 모였고, 함태영이 최린에게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초안을 돌려 읽은 뒤 기독교 측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같은 날 밤 보성사에서는 선언서 2만 1천 매가 인쇄되고 있었습니다.
날짜가 3월 1일이 된 이유에도 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이 검토됐습니다. 그러나 전 황제의 장례일을 택하는 것은 불경이라는 천도교 측 의견이 나왔고, 3월 2일은 주일이니 피하자는 기독교 측 의견이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3월 1일로 정해졌습니다. 목숨을 건 거사를 준비하면서도 주일을 지키려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가는 즉시 돌아왔습니다. 이승훈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22년 7월 21일에야 풀려났습니다. 33인 가운데 가장 늦은 출소였습니다.
수치는 그날의 무게를 다시 말해 줍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분석한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3·1운동 관련 피검자 가운데 종교를 밝힌 사람은 5,990명이었고 그중 개신교인이 3,065명으로 51.2%였습니다. 전체 피검자 기준으로는 16.1%입니다. 인구의 1~1.5%가 잡혀간 사람의 여섯 명 중 한 명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이 오늘의 교회에 증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서 무게를 가졌던 때는 숫자가 많았을 때가 아니라, 값을 치를 사람이 있었을 때였습니다. 정동의 작은 사택에 모여 이름을 적어 넣는 일은 곧 감옥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알고 적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우리가 이어야 할 유산은 자유가 선언에서 시작되어 감옥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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