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평양의 한 사랑방에 학생 두 명이 앉았습니다. 교실도 교사(校舍)도 없었고 선생은 한 명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따라가는 이 연재의 일곱 번째 자리에, 그 방에서 신학교를 시작한 새뮤얼 오스틴 마펫을 놓습니다. 조선에서는 마포삼열로 불린 사람입니다.
그는 1864년 1월 25일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에서 태어났습니다.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 선교사로 지원했고, 1890년 1월 25일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서울에 머무는 삼 년 동안 그가 한 일은 걷는 것이었습니다. 1890년부터 1891년까지 세 차례 북쪽 지방을 돌았습니다. 헐버트와 함께, 게일과 서상륜과 함께 평양과 의주와 만주까지 갔습니다. 그 여행에서 그는 한 가지 판단을 내립니다. 서북 지역 선교의 거점은 평양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893년 그는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평양은 외국인에게 우호적인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랑방에 사람들을 불러 앉히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널다리골교회가 되었고, 이 교회가 뒷날의 장대현교회입니다. 이듬해 1월 평양에서 첫 세례식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 최치량이 있었습니다. 대동강에서 토마스 선교사에게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십팔 년 전에 뿌려진 씨가 이 사람의 손에서 세례로 이어진 것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이 장의 핵심입니다. 마펫은 자기가 직접 전도해서 교회를 늘리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을 앞세웠습니다. 한석진 같은 조사들이 학습반을 조직하고 예배를 이끌게 했습니다. 선교사가 떠나면 무너지는 교회가 아니라,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에게 가르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그의 방향이었습니다.
그 방향이 도달한 지점이 신학교였습니다. 1900년 평양의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신학 교육을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듬해인 1901년, 마펫은 자기 집 사랑방에서 방기창과 김종섭 두 사람을 앉혀 놓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시작입니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 신학 교육기관이 교사도 교재도 없이 두 명으로 출발했습니다.
1907년 그 학교는 첫 졸업생 일곱 명을 냈습니다. 그해 이들이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가 되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이기풍은 제주로 파송됩니다. 사랑방의 두 사람이 일곱 사람이 되고, 그 일곱이 조선 전역으로 흩어진 것입니다. 마펫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오래 섬겼습니다.
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신학교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학생을 위한 숭의여학교를 세웠고, 평양의 숭실 교육에도 참여했습니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된 것은 부흥 한 번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학교와 교회와 사람이 층층이 쌓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은 짧습니다. 1934년 1월 25일, 그는 선교사 정년인 일흔이 되어 은퇴했습니다. 내한한 지 꼭 사십사 년째 되는 생일이었습니다. 은퇴하고도 그는 평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 강요가 조여 오던 1936년, 그는 한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소원은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2006년 5월 9일, 세상을 떠난 지 육십칠 년 만에 그의 유해는 자신이 시작한 학교의 후신인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으로 돌아왔습니다. 평양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 마삼락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선교와 신학 교육에 평생을 썼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디모데후서 2:2). 우리가 이어받을 유산은 큰 건물이 아닙니다. 두 사람을 가르쳐 그 두 사람이 다시 가르치게 하는 일, 그것이 도시 하나를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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