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가 창녀에게 성경을 읽어 달라고 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죄와 벌』의 한가운데입니다. 그가 읽어 달라고 지목한 대목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죄와 벌』은 1866년 러시아의 한 잡지에 연재됐고 이듬해 단행본으로 나왔습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대학생입니다. 그는 세상에 비범한 인간과 평범한 인간이 따로 있으며, 비범한 인간은 더 큰 목적을 위해 법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이론을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려고 전당포 노파를 죽입니다.
살인 이후 그를 무너뜨린 것은 수사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운 이론이 자기를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합니다. 붙잡히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비범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때 그가 찾아간 사람이 소냐입니다. 소냐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굶주린 동생들을 먹여 살리려고 몸을 팔던 여자입니다. 사회의 눈으로 보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라스콜니코프의 이론대로라면 평범한 인간 중에서도 밑바닥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그 사람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가 소냐에게 요구한 것은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읽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냐는 낡은 성경을 꺼내 나사로의 부활을 읽습니다. 이 장면이 이 소설의 중심입니다. 죽은 지 나흘 되어 이미 냄새가 나던 사람이 다시 걸어 나오는 이야기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남자가 앉아서 듣습니다. 소냐는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논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읽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배치를 통해 한 가지를 말합니다. 사람을 되살리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전해진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힘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려다 살인자가 되었고, 소냐는 자기가 받은 말씀을 그대로 건네는 것으로 한 사람을 되돌려 놓습니다. 뒷날 그는 자수하고 시베리아로 갑니다. 소냐는 거기까지 따라갑니다.
이 소설을 종교적이라는 이유로 밀어 두는 독자도 있고, 반대로 신앙 소설로만 읽는 독자도 있습니다. 둘 다 좁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놓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끝까지 따라간 기록이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디서 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판단 기준은 소냐가 읽은 그 본문 자체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부활은 위로의 비유가 아니라 인격입니다. 나사로를 불러낸 분이 라스콜니코프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전제이고, 그 전제를 전달한 사람은 신학자가 아니라 소냐였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질문 하나를 남깁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읽어 줄 만큼 그 말씀을 가까이 두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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