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경험은 신앙을 흔드는 가장 흔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장이 있습니다. 응답 없는 기도가 그렇게 많다면 애초에 듣는 분이 없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반론을 가장 강한 형태로 놓고 답해 보겠습니다.
반론은 세 갈래로 정리됩니다. 첫째, 신자들은 이뤄진 기도만 기억하고 이뤄지지 않은 기도는 세지 않습니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응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통계가 아니라 습관입니다. 둘째, 중보기도의 효과를 확인하려 한 연구들은 일관된 결과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셋째, 그리고 이것이 가장 날카롭습니다. 응답이 오면 하나님이 들으신 것이고, 오지 않으면 더 좋은 뜻이 있는 것이라면, 이 주장은 어떤 경우에도 틀릴 수 없습니다. 틀릴 수 없는 주장은 검증할 수 없고, 검증할 수 없는 주장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정할 것부터 인정하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반론을 자초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믿고 구하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장담한 설교, 응답이 없으면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돌린 상담, 헌금의 액수와 응답을 연결한 메시지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변호할 일이 아니라 회개할 지점입니다. 병든 가족을 위해 밤새 기도했는데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믿음이 모자랐다는 말을 들은 사람에게, 교회는 사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론의 결론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반론은 기도를 자판기로 규정한 뒤 그 자판기가 고장 났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 규정을 성경이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잘못 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고 명시합니다. 기도의 목적을 요청 관철로 정의한 것은 비판자 쪽이고, 성경은 처음부터 기도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뜻을 맞추는 일로 정의했습니다. 상대가 세운 정의로 판정하고 실패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논증이 아닙니다.
둘째, 검증할 수 없다는 비판은 방향을 바꿔 물어야 합니다. 만약 신앙이 사후에 변명을 만들어 내는 체계라면, 무응답의 기록을 애초에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의 고통을 없애 달라고 세 번 간구했고 그 요청은 거절당했습니다. 시편에는 어찌하여 응답하지 않으시느냐는 항의가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불리한 기록을 스스로 보존한 문서를 두고 반증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셋째,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는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요청은 요청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드린 기도조차 그러했다면, 응답 없음은 부재의 증거가 아니라 이 신앙이 처음부터 안고 있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붙드는 구원은 바로 그 거절된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바울이 들은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린도후서 12:9). 요청은 거절됐지만 응답은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주어진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요청대로 되지 않는 기도는 신앙의 예외가 아니라 성경이 정면으로 다루는 주제입니다. 교회가 이 문제를 값싸게 답해 온 잘못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성패를 요청 성사율로 계산하는 방식은 성경의 기도가 아니라 비판자가 만든 기도를 반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기도가 통했는가가 아니라, 응답이 없는 자리에서도 그분 앞에 남아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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