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1월 27일, 한 여성이 양화진에 남편을 묻었습니다. 결혼한 지 일 년 다섯 달 만이었고, 뱃속에는 둘째가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따라가는 이 연재의 여섯 번째 자리에, 그 무덤 앞에 서 있던 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을 놓습니다.
그는 1865년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1886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들어가 1889년 졸업했습니다. 여자가 의사가 되는 일 자체가 드물던 시절이었습니다. 뉴욕 빈민가에서 진료하던 그는 미국 감리회 해외여성선교회에 자원해 1890년 10월 13일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조선에서 그가 맡은 첫 임무는 여성 전용 병원 보구녀관의 진료였습니다.
1892년 6월 27일 그는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합니다. 서울에서 열린 첫 서양인 결혼식이었습니다. 이듬해 11월 10일 아들 셔우드 홀이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으로 기록되는 아이입니다. 1894년 5월, 세 식구는 평양으로 갔습니다.
그해 여름 청일전쟁이 터졌고 평양은 전쟁터가 됐습니다. 윌리엄 홀은 죽어 가는 병사들과 전염병 환자들을 밤낮없이 돌보다 자신도 감염됐습니다. 서울로 돌아와 아내의 치료를 받았지만 11월 24일 서른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로제타 홀은 사흘 뒤 남편을 양화진에 묻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 글은 없었을 것입니다. 남편을 묻은 지 보름 만에 그는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조선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산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조수였던 김점동 부부를 함께 데려갔습니다.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그 김점동이 1900년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가 됩니다. 남편을 잃은 사람이 배 안에서 다음 사람의 진로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95년 1월 딸 이디스가 태어났습니다. 로제타 홀은 미국에 머무는 동안 뉴욕에서 시각장애인 교육에 쓰이는 점자를 연구했습니다. 조선에서 만난 앞 못 보는 아이들이 잊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97년 그는 뉴욕 점자를 바탕으로 한글 점자 교재를 만들었습니다. 배재학당의 한글 학습서 내용을 점자로 옮긴 이 책은 1926년 박두성이 훈맹정음을 발표하기 전까지 약 삼십 년 동안 쓰였습니다. 한국 특수교육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물건입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왔습니다. 1898년 5월 1일 아들과 딸을 데리고 평양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달에 세 살 난 딸 이디스가 이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딸을 양화진 남편 곁에 묻었습니다. 남편과 딸을 같은 땅에 묻고, 그는 평양에 남았습니다.
남은 세월에 그가 한 일은 목록으로만 적어도 길어집니다. 평양에서 시각장애 아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09년에는 청각장애 아동을 위한 학교를 열었습니다. 1913년 평양의 여성병원 광혜여원에 여성의학반을 만들었습니다. 조선 여성이 조선 땅에서 의사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은 1928년 9월 조선여자의학강습소로 열매를 맺었고, 이 학교가 오늘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집니다. 여성 전용 병원과 간호학교, 소아과 병원과 결핵병원도 그의 손을 거쳐 세워졌습니다.
1933년, 예순여덟의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남편을 묻은 1894년부터 헤아리면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도 한복을 즐겨 입었다고 전해집니다. 1951년 4월 5일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남편과 딸이 묻힌 곳에 함께 묻히기를 유언으로 남겼고, 지금 양화진에 그렇게 누워 있습니다. 아들 셔우드 홀은 어머니의 자리를 이어 1926년 의료선교사로 돌아와 결핵 퇴치에 나섰고, 1932년 우리나라 첫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양화진의 두 무덤은 한 여인이 감당한 상실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자란 것은 학교와 병원과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어받을 유산은 잃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잃은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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