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던 사람이 아내를 잃은 뒤 쓴 일기가 있습니다. 『헤아려 본 슬픔』입니다. 1961년 처음 나왔을 때 표지에는 저자 이름이 C. S. 루이스가 아니라 N. W. 클러크라는 낯선 이름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왜 이름을 감췄는지는 책을 펼치면 짐작이 갑니다. 이 안에는 신앙의 모범 답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지, 계신다면 왜 문을 걸어 잠그신 것처럼 느껴지는지를 저자는 숨기지 않고 적었습니다.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을 이성적으로 변증했던 바로 그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자신에게 그 변증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쉰아홉에 조이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결혼할 때 이미 그는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 년 남짓이었고 아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그 뒤의 날들을 공책에 적어 나갔습니다.
이 책이 오래 읽히는 이유는 위로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위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슬픔이 두려움과 얼마나 닮았는지, 사람들이 건네는 상투적인 말이 어떻게 상처가 되는지, 죽은 사람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어떻게 그 사람 대신 자기가 만든 이미지를 붙드는 일로 변질되는지를 냉정하게 관찰합니다. 애도하는 자신을 애도하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의심합니다.
핵심은 책의 후반부에서 드러납니다. 무너진 것은 그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해 마음속에 지어 놓았던 그림이었습니다. 카드로 지은 집이 흔들려 넘어졌다면, 그것이 흔들린 것은 애초에 카드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 앎의 상당 부분은 자기가 편집한 상이었고 고통은 그 상을 부수는 방식으로 찾아왔습니다. 부서진 자리에 남은 것은 자기가 만들지 않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책을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의 실패 기록으로 읽는 것은 오독입니다. 성경 자체가 이런 항의를 담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1). 이 문장은 무신론자의 말이 아니라 시편의 첫 줄이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인용하신 구절입니다. 판단 기준은 여기서 나옵니다.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은 신앙 밖의 행동이 아닙니다. 항의할 대상이 있다고 믿는 사람만 항의할 수 있습니다. 무너져야 할 것과 무너질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 그것이 애도의 신학입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분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다만 위로를 기대하고 펴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 책이 주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동행입니다. 먼저 그 길을 지나간 사람이 남긴 기록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더 큰 힘이 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질문 하나를 남깁니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에 대해 그려 둔 그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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