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5월 31일, 서울 정동의 한옥에 학생 한 명이 들어왔습니다. 미국에서 온 쉰 넘은 여성 선교사가 거의 일 년을 기다린 끝에 맞은 첫 제자였습니다. 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따라가는 이 연재의 다섯 번째 자리에, 그 학교를 연 메리 스크랜턴과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을 놓습니다.
메리 스크랜턴은 1885년 6월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가 조선에 파송한 선교사였습니다.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습니다. 여자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낯선 시대였고, 낯선 서양인에게 딸을 맡길 부모도 없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연원을 1886년 5월 31일 정동 자택에서 여학생 한 명을 데리고 가르친 일에서 찾습니다. 첫 학생은 영어를 배워 통역이 되고 싶어 한 김 부인이었으나 병으로 석 달 만에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그 뒤 가난 때문에 맡겨진 열 살 아이가 들어왔고, 콜레라로 부모를 잃고 버려진 네 살 아이가 합류했습니다. 네 번째 학생이 김점동, 뒷날의 박에스더입니다. 1887년 고종이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내리면서 이 학교는 조선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기관으로 공인받았습니다.
같은 시기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다른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였습니다. 1885년 조선에 들어와 알렌이 세운 제중원에서 몇 주 동안 진료한 뒤, 그해 9월 정동의 자기 집에서 환자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1886년 6월 15일에는 입원실을 갖춘 병원으로 정식 개원했습니다. 고종은 이 병원에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내렸습니다. 베푼다는 뜻의 이름이었습니다.
윌리엄은 정동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정동은 외국인과 양반이 사는 안전한 동네였습니다. 그는 1888년 무렵부터 서대문 밖 애오개와 남대문 상동, 동대문 쪽으로 진료소를 넓혔습니다. 사람이 있는 곳으로 병원이 가야 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이 진료소들이 있던 자리에서 상동교회와 동대문교회, 아현교회가 자라났습니다. 상동교회는 뒷날 전덕기 목사를 비롯한 독립운동 인사들이 모이는 곳이 됩니다.
어머니의 학교와 아들의 병원이 만나는 지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 여성은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기를 꺼려 병이 깊어져도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세운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1887년 10월 31일, 미국에서 온 여의사 메타 하워드가 정동에서 여성 환자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이었고, 여기에 '널리 여성을 구한다'는 뜻의 보구녀관(普救女館)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은 지금도 10월 31일을 설립일로 기념합니다.
열매는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던 김점동은 보구녀관에서 의료를 배웠고, 1896년 미국으로 건너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정식으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1900년 학위를 받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습니다. 십사 년 전만 해도 여자가 글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지던 나라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복음은 힘 있는 자리부터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글을 배울 기회가 없던 여자아이들, 병원 문 앞에서 돌아서야 했던 여성들,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던 사람들에게 학교와 병원이 먼저 열렸습니다. 한 명으로 시작한 교실과 자기 집 방 한 칸에서 시작한 진료가 그 일을 했습니다. 메리 스크랜턴은 190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이사야 42:3). 오늘 우리가 이어가야 할 유산은 크고 안전한 자리가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던 자리에 먼저 문을 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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