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향한 오래된 비판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자기 세대가 끝나기 전에 세상 끝이 온다고 말했고, 그 말은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예언이 틀렸다면 예언자의 권위도 무너진다는 논리입니다. 이 반론을 가장 강한 형태로 놓고 답해 보겠습니다.
반론의 근거는 분명한 성경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4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8절에도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를 설명하면서 바로 이 대목을 들었습니다. 신약학계에서도 예수의 메시지를 임박한 종말 기대로 설명하는 해석이 오랫동안 한 축을 이루어 왔습니다. 허수아비가 아니라 실제로 무게 있는 반론입니다.
먼저 인정할 것을 인정합니다. 초대교회 안에 재림이 곧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사에서 날짜를 계산하려던 시도들은 예외 없이 실패했습니다. 한국 교회도 1992년 특정 날짜를 지목한 주장으로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변호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할 일입니다.
그러나 반론의 결론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같은 담화 안에 정반대 진술이 있습니다. 34절에서 두 절 뒤인 36절에서 예수께서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며 아들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만약 예수께서 시점을 못 박으셨다면, 두 문장 뒤에서 스스로 모른다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 사람의 말을 해석할 때는 가장 가까운 문맥이 우선입니다. 34절을 시한 예고로 읽는 해석은 36절과 충돌합니다.
둘째, 제자들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성전이 무너진다는 말씀을 듣고 놀라 물었습니다. 24장의 답변에는 성전과 예루살렘의 운명에 관한 내용이 상당 부분 들어 있고, 그 일은 주후 70년 로마군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실제 일어났습니다. 이 세대라는 표현이 그 사건을 가리킨다는 해석은 본문의 질문 구조에 근거한 것이지 궁색한 변명이 아닙니다.
셋째, 만약 초대교회가 빗나간 예언을 감추려 했다면 이런 본문들을 남겨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도 모른다는 구절은 후대 교회에 신학적 부담이 되는 문장입니다. 그런데도 삭제되지 않고 전해졌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는 주가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이 그대로 인용돼 있습니다. 불리한 목소리를 지우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문서들의 정직성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그 조롱에 이렇게 답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시점을 예고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모른다고 명시하셨습니다. 이 세대 발언은 성전 파괴에 관한 질문의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연을 문제 삼는 목소리는 성경 밖이 아니라 성경 안에 이미 기록돼 답을 얻었습니다. 날짜를 계산하는 사람은 성경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금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시계가 아니라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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