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언더우드, 금지된 땅에서 준 세례

루카 · 2026.08.07

루카저널은 한국 교회를 세운 사람들의 발자취를 순서대로 싣고 있습니다. 네 번째 자리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입니다. 그가 조선에 왔을 때 조선인에게 전도하는 일은 법으로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 금지 아래에서 그가 무엇을 했는지가 이 장의 내용입니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뉴브런즈윅의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원래 그가 준비하던 선교지는 인도였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뒤에도 인도에서 쓸 생각으로 1년간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는 그를 조선에 파송하기로 결정합니다. 한국에 온 최초의 목회 선교사가 이렇게 정해졌습니다.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그는 이듬해 1월 요코하마에 닿았습니다. 조선은 그해 겨울 갑신정변으로 어수선했습니다. 그는 일본에 머물며 조선말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 제물포 앞바다에 도착해 이틀 뒤 땅을 밟았습니다. 같은 배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가 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선교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온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우선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됐습니다. 1886년 2월에는 미국 공사관을 통해 고아원 설립 허가를 신청해 승인을 받았습니다. 길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기르는 일이었습니다. 이 고아원이 훗날 경신학교가 됩니다. 그곳 학생 중에 뒷날 독립운동가가 된 김규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886년 7월, 그는 노춘경이라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조선 땅 안에서 조선인이 받은 첫 개신교 세례로 기록되는 일입니다. 노춘경은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읽다가 오히려 궁금해졌고, 한문 복음서를 구해 밤새 읽은 뒤 언더우드를 찾아왔습니다. 세례일이 7월 11일인지 18일인지는 자료마다 갈립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발각되면 두 사람 모두 위험해지는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세례는 문을 닫아걸고 비밀리에 진행됐습니다.

1887년 9월 27일, 그는 정동 자기 집에서 조선인 신자 열네 명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새문안교회의 시작이며 한국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입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열네 명 가운데 열세 명은 언더우드가 전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만주에서 로스에게 세례를 받은 서상륜과 그의 전도를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선교사가 씨를 뿌리고 조선인이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라, 조선인이 이미 뿌려 둔 밭에 선교사가 도착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세 차례 북쪽 지방을 걸어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1887년 가을 개성과 솔내와 평양과 의주를, 1888년 봄에는 아펜젤러와 함께 평양까지, 1889년 봄에는 신혼여행을 겸해 강계와 압록강변까지 갔습니다. 한영문법과 한영사전을 펴냈고,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했으며, 기독청년회 조직에 참여했습니다. 1915년 3월 5일에는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학생 예순 명으로 경신학교 대학부를 열었습니다. 연희전문학교의 모태입니다.

말년은 짧고 급했습니다. 1916년 초 일본의 교육령에 맞추려고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아홉 시간씩 일본어를 공부하다 몸이 무너졌습니다. 그해 3월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고, 10월 12일 애틀랜틱시티의 병원에서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 땅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999년 5월 20일 양화진으로 옮겨졌습니다. 조선 땅을 택한 첫걸음이 백십사 년 만에 그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우리가 이어받을 유산은 이것입니다. 그는 금지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했고, 이미 믿고 있던 조선인들의 자리를 빼앗지 않고 그 곁에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