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도둑맞은 은식기를 들고 주교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붙잡혀 온 사람은 전날 밤 그 집에서 잠자리와 식사를 얻은 출소자입니다. 주교는 은식기가 자기 선물이라고 말한 뒤, 벽난로 위의 은촛대까지 가져와 손에 쥐여 줍니다.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발표한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의 인생이 갈라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감동으로만 읽으면 절반을 놓칩니다. 주교가 한 일은 관대함이 아니라 손해였습니다. 그는 도둑맞은 물건을 되찾을 권리를 포기했고, 그 대가로 한 사람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용서에는 늘 계산서가 따라옵니다. 누군가 그 값을 치러야 하고, 여기서는 피해자인 주교가 치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도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계산서를 누가 떠안느냐의 문제입니다.
다만 분별할 대목도 있습니다. 주교의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은식기는 선물이 아니라 도난품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두고 거짓말이 정당화되느냐는 논쟁이 오래 이어져 온 이유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 대목을 무비판적으로 승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소설이 강조하는 무게 중심은 진술의 진위가 아니라 그다음에 있습니다. 주교는 장발장을 풀어 준 뒤, 이제 그의 영혼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벌을 면제해 준 것이 아니라 소유권을 옮겨 준 것입니다. 그가 촛대를 준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촛대는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 네가 이제 다른 사람이라는 표시였습니다.
이후 장발장의 삶은 그 표시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공장을 운영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지만, 무고한 사람이 자기 대신 재판을 받게 되자 법정에 나가 스스로 신분을 밝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흉내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고는 회심을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선택의 연속으로 그립니다.
기준은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사람이 바뀌는 것은 자기 결심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자기를 대신해 손해를 감수한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장발장에게는 주교가 그랬고,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미움과 보복이 자연스러운 반응이 된 시대에 이 소설은 오래된 질문 하나를 다시 놓습니다. 요약본이나 뮤지컬로 접하셨다면 1부의 주교 대목만이라도 원작으로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해친 사람에게 나는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가 대가를 치르기만 기다리고 있는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