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두 살의 남자가 밀라노의 어느 정원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담장 너머에서 아이의 노랫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집어서 읽어라. 그는 일어나 곁에 두었던 바울 서신을 펼쳤고, 눈에 들어온 몇 줄에서 오랜 망설임이 끝났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8권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고백록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397년에서 400년 사이에 라틴어로 쓴 책입니다. 회심은 386년의 일이었고, 그는 이듬해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즉 이 책은 사건 직후의 기록이 아니라 십여 년이 지난 뒤 주교가 된 사람이 돌아보며 쓴 글입니다. 제목은 죄를 털어놓는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는 일과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이 한 단어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정원 장면에서 눈여겨볼 것은 그가 무엇을 몰랐는가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수사학 교수였고,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었고, 철학을 통해 기독교 진리의 윤곽까지 파악한 상태였습니다. 그가 넘지 못한 것은 지식의 벽이 아니라 의지의 벽이었습니다. 내일, 또 내일이라고 미루는 자신을 그는 견디지 못해 울었습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거리, 고백록이 오늘까지 읽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를 건너게 한 것은 새로운 깨달음이 아니라 이미 있던 책 한 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언제든 펼칠 수 있는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만 펼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날 그가 읽은 대목은 로마서였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14). 회심은 그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사건이 아니라, 알던 말씀 앞에서 항복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분별할 것이 있습니다. 고백록은 극적인 체험담으로 소비되기 쉬운 책입니다. 그러나 정원의 목소리가 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이 중심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그 순간에 들은 소리를 설명하기보다, 그것이 자신을 성경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체험을 근거로 삼는 신앙과 말씀을 근거로 삼는 신앙을 구별해야 합니다. 체험은 사람마다 다르고 반복되지 않지만, 말씀은 누구에게나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전체가 열세 권이라 부담스럽다면 회심의 과정을 다루는 8권부터 펼쳐도 좋습니다. 문장은 오래됐지만 다루는 문제는 오늘 그대로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미루고 있는 순종은 무엇을 몰라서인가, 아니면 알면서 미루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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