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니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복 가망이 없고 고통만 남았다면, 그 고통을 끝낼 선택지를 국가가 막는 것이야말로 인권 침해라는 논리입니다. 이 주장은 가볍지 않습니다. 실제 병상의 고통을 본 사람일수록 더 진지하게 이 물음 앞에 섭니다.
먼저 인정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통증 조절 없이 방치된 임종은 존엄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한 연명 시술을 무한정 이어 가는 것이 생명 존중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이 2018년부터 연명의료결정 제도를 운영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치료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인공적 연장을 중단하는 것과, 약물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은 성격이 다른 문제입니다. 이 구분을 흐리면 논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조력사망을 제도로 도입한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캐나다는 2016년 조력사망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처음에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로 대상이 한정돼 있었으나, 법원 판결을 거쳐 2021년 그 요건이 사라졌습니다. 이후 정신질환만을 사유로 한 신청까지 허용하는 확대안이 추진되다 준비 부족을 이유로 2027년으로 연기됐고, 올해 6월에는 의회 위원회가 이 확대를 무기한 중단하라고 권고했다고 캐나다 공영방송 CBC가 보도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2023년 안락사 검토위원회에 보고된 건수가 9천 건을 넘어 그해 전체 사망자의 5퍼센트를 넘어섰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 이 논쟁의 핵심입니다. 조력사망은 개인의 선택으로 시작되지만 제도로 굳으면 사회의 압력이 됩니다. 국제연합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캐나다 정부에 관련 조항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고, 캐나다 현지에서는 장애인과 저소득층이 충분한 돌봄 대신 죽음을 권유받는 사례가 보고돼 왔습니다. 돌봄에는 예산과 사람이 들고, 죽음에는 그보다 훨씬 적게 듭니다. 선택권이라는 이름은 그대로인데,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 부담이 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도 일관되지 않습니다. 국가는 한편으로 자살 예방에 예산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 특정 조건의 자살을 의료 행위로 승인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고통은 살려야 하고 어떤 고통은 끝내도 되는지 누가 정하는가. 그 기준선은 처음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고, 실제로 도입한 나라마다 그 선은 계속 넓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성경의 기준은 생명의 소유권에 있습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체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기 12:10). 사람은 자기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함부로 줄일 권한도, 무의미하게 늘릴 의무도 갖지 않습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 아니라 고통 곁에 머무는 일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처음 이레 동안 아무 말 없이 함께 앉아 있었을 때, 그들은 옳았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연명 시술 중단과 조력사망은 다른 문제이며 이를 뒤섞은 논의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둘째, 제도화된 선택권은 약자에게 압력으로 되돌아오며, 이는 이미 자료로 확인되는 현실입니다. 셋째, 생명은 우리 소유가 아니므로 처분 권한도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고통이지 고통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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