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에 나온 한글판 천로역정에는 삽화 마흔두 점이 실려 있습니다. 그 그림 속 주인공은 서양 사람이 아닙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조선 사람이 등에 짐을 지고 길을 떠납니다. 등짐은 그가 벗지 못하는 죄의 무게입니다. 조선의 독자는 그림을 펼치는 순간,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자기 이웃이 길을 나서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원작을 쓴 존 번연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작가입니다. 허가 없이 설교했다는 이유로 오랜 기간 옥에 갇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천로역정 1부는 1678년 런던에서, 2부는 1684년에 나왔습니다. 한국에는 캐나다 출신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1895년에 텬로력뎡이라는 제목으로 옮겨 소개했습니다. 당시 서양 문학은 대개 중국어나 일본어 번역본을 다시 옮기는 방식으로 들어왔는데, 이 책은 영어 원문에서 직접 옮겼습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된 영문 소설로 꼽힙니다. 삽화는 개항장에서 활동하던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그렸습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목판본과 연활자본 두 종을 소장하고 있고, 이 책은 2017년 5월 등록문화재 제685호로 지정됐습니다.
주목할 대목은 게일이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바꾸지 않았는가입니다. 그는 옷과 배경을 바꿨습니다. 인명과 지명도 조선식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등짐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 짐이 굴러떨어지는 장면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좁은 문도, 절망의 늪도, 마지막 강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바꾼 것은 독자가 걸려 넘어질 형식이었고, 바꾸지 않은 것은 독자가 반드시 걸려야 할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구분을 자주 놓칩니다. 복음을 전할 때 형식과 내용이 함께 흔들립니다. 젊은 세대가 알아듣게 하겠다며 언어를 바꾸다가 죄와 회개와 심판까지 흐릿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집니다. 반대로 내용을 지키겠다며 백 년 전 어투와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말을 고집하다가, 정작 들어야 할 사람이 첫 문장에서 책을 덮게 만들기도 합니다. 게일은 양쪽 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은 조선 것으로 바꾸고, 짐은 그대로 지웠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도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린도전서 9:22). 바울이 여러 모습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여러 복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하고자 함이니라는 목적어가 문장의 방향을 고정합니다. 목적이 고정돼 있을 때 형식의 변화는 지혜가 되고, 목적이 흐려질 때 형식의 변화는 타협이 됩니다. 이 경계를 잃으면 토착화는 혼합주의로 넘어갑니다.
이 책은 지금도 현대어 번역본으로 쉽게 구할 수 있고, 김준근의 삽화를 함께 실은 판본도 나와 있습니다. 읽으실 때 줄거리보다 등짐이 언제 떨어지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물음을 남깁니다. 내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신앙을 이야기할 때, 나는 옷을 바꾸고 있습니까, 짐을 덜어 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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