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성경은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여러 언어를 거쳐 옮겨졌으며, 번역본마다 문장이 다릅니다. 말을 옮기다 보면 뜻이 조금씩 어긋나고, 그것이 이천 년 동안 쌓였다면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은 원래 내용과 상당히 다를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게다가 번역한 사람들이 모두 신앙 공동체 소속이었으니 교리에 맞게 손질했으리라는 의심도 함께 제기됩니다.
이 주장은 흔히 말 전하기 놀이에 비유됩니다. 사람을 거칠수록 문장이 망가지는 그 놀이입니다. 비유는 선명하지만, 실제 번역 과정과는 구조가 다릅니다.
말 전하기 놀이에서 오류가 쌓이는 이유는 참가자가 앞사람의 말만 듣고 원문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번역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 번역본은 앞선 번역본을 옮긴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사본을 직접 다시 읽어 옮긴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개역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어 사본이 남아 있는 한, 번역은 매번 원문 앞으로 되돌아가 대조됩니다. 오류가 누적되는 구조가 아니라 세대마다 원문에 맞춰 교정되는 구조입니다.
본문 자체가 얼마나 잘 보존됐는지를 보여 준 사건도 있습니다. 1947년 사해 인근 쿰란에서 두루마리들이 발견됐습니다. 그 안에 있던 이사야서 사본은 그때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성경 사본보다 대략 천 년이 앞선 것이었습니다. 천 년의 간격을 두고 두 본문을 나란히 놓고 대조할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결과는 철자와 표기 차이 수준의 사소한 편차를 빼면 내용이 사실상 같았습니다. 천 년 동안 필사가 이어졌는데도 본문이 흘러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정직하게 인정할 것이 있습니다. 사본들 사이에 차이가 실제로 존재하고, 그중에는 단어 하나가 아니라 문단 단위인 것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마지막 부분과 요한복음의 간음한 여인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감춰진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서점에서 사는 성경의 각주에 어떤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다고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교리에 맞춰 손질했다는 의심이 사실이라면, 가장 먼저 지웠어야 할 것이 바로 그 각주입니다. 불리한 정보를 본문 아래에 인쇄해 독자에게 넘기는 것은 은폐의 방식이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짚을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 가운데 논쟁 중인 이문에 근거를 둔 것은 없습니다.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 재림은 사본이 갈리지 않는 본문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차이가 있는 대목은 있지만, 그 차이가 신앙의 기둥을 흔드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말합니다.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1:23). 이어지는 구절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고 선언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경 번역은 오류가 누적되는 전달 놀이가 아니라 매번 원문으로 되돌아가는 대조 작업입니다. 쿰란의 발견은 천 년 동안의 필사가 본문을 바꾸지 않았음을 실물로 보여 주었습니다. 사본 간 차이는 존재하지만 숨겨지지 않았고, 어떤 교리도 그 차이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은,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원문 앞으로 되돌아가 확인하고 또 확인한 결과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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