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은 괴물이 사람을 해치는 대목이 아닙니다. 알프스의 빙하 위에서 창조자와 피조물이 마주 서고, 피조물이 먼저 입을 여는 장면입니다. 왜 나를 만들었느냐고 그는 묻습니다.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메리 셸리가 이 소설을 처음 내놓은 것은 1818년이며, 초판은 익명으로 출간됐습니다. 이름을 밝힌 개정판은 1831년에 나왔습니다. 원제에 붙은 부제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입니다.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네고 영원한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을, 생명을 만들어 내려 한 과학도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겹쳐 놓은 것입니다. 표제지에는 밀턴의 『실낙원』에서 아담이 창조주에게 던지는 항변이 인용돼 있었습니다.
흔히 이 작품은 과학의 오만을 경고한 이야기로 요약됩니다. 절반만 맞습니다. 소설에서 빅터의 죄는 생명을 만든 그 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만들어진 존재를 보고 놀라 그 자리를 떠나 버린 데서 완성됩니다. 그는 몇 년을 매달려 무언가를 존재하게 해 놓고, 그것이 눈을 뜨자 방을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벌어지는 모든 참극은 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유기의 결과입니다.
피조물이 아담을 언급하며 자신을 비교하는 대목이 그래서 뼈아픕니다. 아담에게는 지어 준 이가 곁에 있었고 돌봄이 있었는데 자신에게는 그것이 없었다는 항변입니다. 셸리는 창조 자체를 저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책임 없는 창조를 저주로 그렸습니다.
이 지점에서 성경은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시편 139:14). 같은 시편은 사람이 형질을 이루기 전부터 하나님이 보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창조주는 만들고 떠나는 분이 아니라 만든 것을 끝까지 아는 분입니다. 빅터와 하나님의 차이는 능력의 크기가 아니라 남아 있느냐 떠나느냐에 있습니다.
이 소설이 200년 뒤 인공지능 논쟁 속에서 다시 읽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논쟁의 상당 부분은 만들 수 있느냐에 쏠려 있습니다. 정작 셸리가 던진 질문은 그다음입니다. 만든 뒤에 누가 남아 있을 것인가.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를 대신하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어떤 판단을 대신 내릴 때, 그 결과 앞에 서서 책임질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기술을 만든 이가 방을 나가 버리면, 남는 것은 결과를 감당하는 이웃들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려고 쓰인 소설이 아닙니다. 셸리의 세계에는 죄를 씻는 길도, 회복시키는 구원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계를 알고 읽되,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이만큼 정직하게 그린 작품도 드뭅니다. 성취는 성취대로 인정할 만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몽블랑 대면 장면이 있는 부분부터 펼쳐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시작해 놓고 결과를 확인하지 않은 채 자리를 뜬 일이 있습니까. 그 자리에 지금 누가 남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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