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배위량 선교사, 걸어서 연 경상도 선교

루카 · 2026.08.02

지금 경상북도의 여러 군은 인구 소멸을 걱정합니다. 130여 년 전 같은 땅은 복음이 한 번도 닿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그 길을 처음 끝까지 걸어간 사람이 배위량 선교사입니다.

배위량은 미국 이름 윌리엄 마틴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1862~1931)입니다. 미국 인디애나에서 태어나 하노버 대학과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원래 중국 선교사로 임명돼 있었으나,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요청을 받아 한국행을 택했습니다. 1890년 11월 애니 로리 아담스와 결혼했고, 결혼한 그날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내한한 것은 1891년 1월입니다.

당시 북장로회는 서울 밖에 두 개의 거점을 두기로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북쪽은 평양, 남쪽은 부산이었습니다. 평양은 그의 신학교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마펫이 맡았고, 부산은 배위량이 맡았습니다.

부산에 자리를 잡은 그는 곧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1893년 4월 17일 동래를 떠나 한 달이 넘는 순회 전도에 나섰습니다. 걸어서 엿새 만인 4월 22일 대구에 닿았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울산과 경주, 안동과 상주를 비롯한 경상도 북부를 둘러보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가 감상이 아니라 판단으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그가 대구를 다음 거점으로 지목하며 든 이유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경상도 북부의 중심지이고, 인구가 가장 많이 모여 있으며,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큰길과 낙동강이 지나 어느 방향에서도 접근하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상감영이 있어 정치적으로 중요하고, 약령시가 열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점도 적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가장 오래 머물 자리를 계산했습니다.

1896년 4월 그는 가족을 데리고 대구로 이사해 내륙 최초의 선교부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12월, 서울의 교육 담당 고문으로 임명되면서 대구를 떠나게 됩니다. 자신이 연 사역을 처남인 아담스 선교사에게 넘겼습니다. 1897년에는 평양으로 옮겨 숭실학당을 세웁니다. 뒷날의 숭실대학입니다.

그가 대구에 머문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습니다. 길을 낸 사람과 그 길에서 열매를 거둔 사람이 달랐습니다. 그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이 있습니다. 배위량이 걸었을 때 그 길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는 없는 곳을 향해 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있던 교회가 비어 가는 시대를 삽니다. 방향은 반대지만 질문은 같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눈을 들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한복음 4:35). 배위량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경상도 내륙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유산은 그의 성과가 아니라, 사람이 없는 곳을 먼저 본 그 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