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이기풍, 한국 교회가 보낸 첫 사람

루카 · 2026.08.01

한국 교회가 선교사를 받기만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처음으로 사람을 보낸 것은 1907년입니다. 그리고 보냄을 받아 제주도로 건너간 사람이 이기풍 목사입니다. 오늘은 받는 교회가 보내는 교회로 바뀐 그 첫 장면을 살펴봅니다.

이기풍은 1865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 연도는 1868년으로 보는 기록도 있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복음을 전하는 편이 아니라 막는 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여러 교회사 자료는 그가 새뮤얼 마펫 선교사의 전도를 방해했다고 기록합니다.

전환점은 청일전쟁 이후였습니다. 피난길에 오른 그는 원산에서 윌리엄 스월런 선교사를 만났고, 1894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방해하던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 되었고, 배우던 사람이 결국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1907년 5월,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해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이 일곱 명이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함께 안수받은 이들 중에는 그해 평양대부흥의 중심에 있던 길선주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노회에서 결정이 하나 더 내려집니다. 제주도에 선교사를 한 사람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지목된 사람이 이기풍이었습니다. 안수를 받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가장 먼 곳으로 가라는 명을 받은 셈입니다.

제주는 쉬운 땅이 아니었습니다. 1901년 신축교난으로 천주교 신자 수백 명이 희생된 기억이 아직 생생했고, 섬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부인 윤함애와 함께 제주에 도착한 것은 1908년 초입니다. 정확한 입도 시점은 그해 정월로 기록한 비문과 2월 말에서 3월 초로 보는 연구가 엇갈립니다.

처음에는 잠잘 곳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섬 구석구석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과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에 보고된 제주 교세는 예배당 세 곳, 기도 처소 다섯 곳, 학교 한 곳이었습니다. 교인은 세례교인 58명과 학습교인 57명을 포함해 모두 410명이었습니다. 당시 제주의 형편을 생각하면 작지 않은 숫자입니다.

제주 사역을 마친 뒤에도 그의 길은 이어졌습니다. 1918년 광주 북문내교회 초대 목사로 부임했고, 1921년에는 장로회 총회장을 맡았습니다. 예순을 넘긴 뒤에도 순천과 고흥, 다시 제주, 그리고 칠순의 나이에 여수 남면 우학리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1938년입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그는 호남 지역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맞섰고, 검속되어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직전 심한 고문으로 쓰러졌습니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회복하지 못했고, 1942년 6월 2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람의 생애는 한국 교회에 한 가지를 증언합니다. 복음을 받은 교회는 반드시 보내는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조선 땅에 첫 선교사가 들어온 지 20여 년 만에 이 교회는 자기 사람을 뽑아 가장 먼 곳으로 보냈습니다. 받은 것을 쌓아 두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오늘 한국 교회가 이어받아야 할 유산은 화려한 부흥의 기억이 아니라, 보내라는 말에 손을 들었던 한 사람의 응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