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를 두고 자주 나오는 비판이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민족의 언어와 관습을 지웠다는 주장입니다. 오늘은 이 비판을 가장 강한 형태로 놓고 하나씩 따져 보겠습니다.
비판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19세기 서구 선교의 확장기는 서구 제국의 팽창기와 정확히 겹칩니다. 선교사들은 제국이 무력으로 열어젖힌 항구를 통해 들어갔고, 조약과 군함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전통 의례를 미신으로 규정해 금지했고, 개종자의 이름과 옷차림까지 서구식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은 서구 문명의 포장지였다는 것입니다.
먼저 인정할 것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이 비판에는 사실인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제국의 편의를 위해 협력한 선교사가 있었고, 복음의 본질과 서구 관습을 구별하지 못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특히 여러 나라에서 교회 이름으로 운영된 원주민 기숙학교 제도는 아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런 일들은 변호할 대상이 아니라 회개할 지점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정할 것을 인정한 뒤에도 남는 문제가 있습니다. 시기가 겹친다는 사실이 곧 목적이 같았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대규모 자료로 검증한 연구가 있습니다. 정치학자 로버트 우드베리는 2012년 미국정치학회보(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106권 2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회심을 목표로 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지역과 오늘날 안정적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지역 사이에 통계적으로 뚜렷한 연관이 있음을 보였습니다. 그는 이들 선교사가 종교 자유와 대중 교육, 대중 인쇄와 신문, 자발적 결사, 그리고 식민지 개혁과 비백인의 법적 보호를 확산시킨 촉매였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논문이 반복해서 보여 주는 장면은 선교사가 식민 당국에 협력한 장면이 아니라 충돌한 장면입니다.
둘째, 선교의 핵심 작업 자체가 문화 획일화와 반대 방향입니다. 성경을 그 민족의 말로 옮기는 일이 선교의 첫 과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문자가 없던 언어에 문자가 생겼고, 밀려나 있던 문자가 되살아났습니다. 우리나라가 그 사례입니다. 한문이 지식의 언어이던 사회에서 선교사들은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고 한글로 신문과 교과서를 펴냈습니다. 자기 문명을 이식하려는 사람이 굳이 상대의 말을 배워 그 말로 책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셋째, 한국사가 직접 답을 줍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은 이를 거부했고 상당수가 추방됐습니다. 제국의 도구였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넷째, 오늘의 지형이 이 비판을 낡은 것으로 만듭니다. 지금 세계 선교의 무게중심은 서구 밖으로 옮겨 갔습니다. 지난 7월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청년 선교대회에는 50개국에서 약 4천 명이 모였습니다. 아시아 교회가 아시아를 향해 사람을 보내고, 아프리카 교회가 자기 대륙과 그 너머로 사람을 보냅니다. 서구가 비서구에 무언가를 이식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교회 역사의 가장 이른 시점에 이미 결론지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첫 공식 회의였던 예루살렘 공회는 이방인 신자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사도행전 15장). 복음을 받으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교회가 스스로 기각한 것입니다. 요한이 본 마지막 장면에도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그대로 서 있습니다(요한계시록 7:9). 하나의 문화로 녹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를 가진 채 함께 서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선교사가 제국과 결탁한 사례는 실재했고 교회는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그러나 대규모 실증 연구는 선교사들이 종교 자유와 교육, 법적 보호의 확산에 기여했음을 보여 줍니다. 셋째, 성경이 그리는 완성된 세계는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모든 언어가 함께 있는 세계입니다.
복음은 한 문명이 다른 문명에 건네는 물건이 아닙니다. 복음이 각 민족의 말로 번역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소식이 어느 한 문명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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