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도사가 황제와 제국의 모든 권력 앞에 서서 자기 글을 취소하지 않겠다고 말한 날이 있습니다. 1521년 4월 18일, 독일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였습니다. 종교개혁의 방향을 결정한 장면이자, 신앙의 담대함이 무엇인지 보여준 기록입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면벌부 판매의 문제를 지적하는 반박문을 내면서 논쟁의 중심에 섰습니다. 면벌부는 돈을 내면 죄에 따르는 벌이 면제된다고 선전되던 증서입니다. 논쟁은 확대됐고 1521년 1월 루터는 교회로부터 파문됐습니다. 파문은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처분으로, 당시로서는 사회적 사망 선고에 가까웠습니다.
같은 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열었습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요청으로 루터에게 해명 기회가 주어졌고, 루터는 소환을 받았습니다. 주변에서는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100여 년 전 같은 방식으로 소환된 체코의 개혁자 얀 후스가 안전 보장을 약속받고 갔다가 화형당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보름스에 지붕의 기와만큼 마귀가 많아도 가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4월 16일 보름스에 도착한 루터는 다음 날 황제와 제후들 앞에 섰습니다. 질문은 두 가지였습니다. 여기 놓인 책들이 당신이 쓴 것이 맞는가. 그 내용을 철회할 것인가. 첫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는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그는 즉흥적인 객기로 버틴 것이 아니라 하룻밤을 두고 정리한 뒤 대답했습니다.
4월 18일 그가 내놓은 답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으로 자신이 틀렸음을 설득하지 않는 한 철회할 수 없다, 자신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인용되는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후대의 기록에서 덧붙여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러나 철회를 거부한 사실과 그 근거는 회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 근거의 성격입니다. 루터는 내 소신이라 물러설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과 이성으로 반박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자기 확신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기준을 내세운 것입니다. 기준이 자기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권력 앞에서도 그 자리를 옮길 수 없었습니다.
대가는 곧 돌아왔습니다. 그해 5월 제국의회는 루터를 법의 보호 밖에 두는 칙령을 공포했습니다. 누구든 그를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겼고, 루터는 그곳에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1522년에 신약이, 1534년에 구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가 나왔습니다. 사제만 읽던 성경이 평범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루터의 생애 전체가 흠 없이 평가되지는 않습니다. 후기의 격한 논쟁 문서, 특히 유대인에 대한 저술은 오늘날 개신교 안에서도 비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보름스에서의 그 하루는 별개로 남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확인되는 것이 있고, 그날 확인된 것은 신앙의 최종 권위가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원칙이었습니다.
"또 왕들 앞에서 주의 교훈들을 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겠사오며"(시편 119:46). 우리가 이어가야 할 유산은 권력 앞에서도 옮기지 않는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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