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반세기 넘게 침묵했던 죄를 처음으로 공개 인정한 사람은, 당시 가장 존경받던 목회자였습니다. 1992년 6월 18일 서울 여의도, 영락교회 원로 한경직 목사는 자신의 수상 축하 예배에서 자신이 신사참배를 한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겸손이 무엇인지 설명이 아니라 한 장면으로 남은 사건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1902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신의주에서 목회했고, 광복 직후 공산 정권의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서울에서 영락교회를 세워 피란민들을 모았고, 이후 학교와 복지기관을 세우며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문제의 뿌리는 1938년입니다. 그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의 강요 아래 신사참배를 결의했습니다. 신사참배는 일본이 세운 신사에 절하도록 강제한 의식입니다. 이를 거부한 목회자와 성도 다수가 투옥되고 순교했습니다. 해방 이후 1950년대 총회에서 회개 결의가 있었지만, 한국교회 전체의 고백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오랫동안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침묵을 깬 계기는 상이었습니다. 1992년 한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았습니다. 상금 102만 달러는 전액 북한을 돕는 성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는 1분 동안 백만장자가 되어 봤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6월 18일 여의도에서 열린 수상 감사예배에서, 준비된 인사말 대신 자신의 죄를 꺼냈습니다.
그가 한 말은 길지 않았습니다.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고 말했고, 자신은 신사참배를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 죄를 제대로 참회하지 않은 것이 일생의 짐이었으며, 우상숭배의 죄를 이제야 참회한다고 했습니다. 국민일보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좌중은 숙연해졌습니다. 그때 그는 아흔 살, 이미 은퇴한 원로였고, 국제적 명예를 받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 조건은 모두 침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고백은 개인의 정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사참배 결의 60주년이 되는 1998년 9월 9일, 원로 목사와 장로 450여 명이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 모여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이후 교단별 죄책 고백 선언이 이어졌습니다. 한 사람의 자백이 제도의 회개를 끌어낸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도 자백하지 않는 동안 제도는 54년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의 고백에는 주목할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시대를 탓하지도, 총회의 결의를 앞세우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우리가 아니라 나라고 말했습니다. 신사참배는 총회가 공식 결의한 일이었으므로 개인이 그 뒤에 숨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강요당한 시대였다고 설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겸손은 평판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잃을 평판이 있는 사람이 할 때 값이 드러납니다.
2000년 그가 98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남긴 재산은 말년에 타던 휠체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입던 옷가지와 생필품이 전부였다고 유족이 밝혔습니다. 하루 만에 100만 달러를 내놓았던 사람의 결산입니다.
"그러므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 4:10). 우리가 이어가야 할 유산은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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