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와 맺은 군사 동맹은 지금까지 단 하나뿐입니다. 1953년 10월 1일에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회의장에서 순조롭게 합의된 문서가 아니라, 정전협정을 앞둔 넉 달 동안의 격렬한 충돌 끝에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기록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953년 6월 8일, 판문점에서 포로 송환 협상이 타결되면서 정전협정 체결은 사실상 확정됐습니다. 문제는 정전 이후였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가 보기에 아무런 재발 방지 장치 없는 정전은 나라의 생존을 보장하지 못하는 문서였습니다. 앞서 1952년 10월, 변영태 외무부장관은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 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사령부와 협의 없이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습니다. 부산과 마산, 대구, 논산, 광주 등지의 수용소에서 2만 명이 넘는 포로가 풀려났습니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한국군을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둔다는 공약을 위반한 것이라며 즉시 책임을 물었습니다. 정전협정 체결은 연기됐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갈립니다. 동맹국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깬 위험한 도박이었다는 비판이 있고, 협상력이 거의 없던 약소국이 국익을 관철하기 위해 쓸 수 있었던 마지막 수단이었다는 평가가 함께 존재합니다. 다만 결과는 분명합니다. 미국은 예정대로 월터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대통령 특사로 서울에 보냈고, 약 2주에 걸친 교섭이 시작됐습니다. 조약의 체결 시점, 한국군의 규모, 유엔군의 한국군 작전 지휘권 존속 여부가 쟁점이었습니다.
교섭 끝에 1953년 7월 12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는 한미 공동성명이 나왔습니다. 정전협정 서명을 보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서명됐고, 10월 1일 조약이 조인됐습니다. 조약은 전문과 본문 여섯 개 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의 무력 공격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결의를 담았습니다. 이 조약에 근거해 미국은 육해공군을 한국 영토와 그 부근에 배치할 수 있게 됐습니다. 미국 상원은 이듬해 1월 26일 찬성 81표 대 반대 6표로 조약을 가결했고, 조약은 1954년 11월 17일 정식 발효됐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이 역사에서 읽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안전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방위 체제는 나라가 사라질 수도 있던 시기에 사람들이 밤을 새워 다투고 설득해서 얻어 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 이전에 역사에 대한 예의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조약은 반석이 아닙니다. 조약을 얻어 낸 그 세대는 조약 하나로 나라가 선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제헌국회가 기도로 문을 열었던 나라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편 127:1). 파수꾼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파수꾼을 세우되 그가 최종 보장이 아님을 알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유산은 조약 문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서를 얻기 위해 애쓰면서도 나라의 주인은 따로 계시다고 고백했던 그 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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