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처음 펼친 사람이 가장 크게 걸려 넘어지는 대목은 대개 여호수아서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주민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종족 절멸을 지시할 수 있는가, 오늘 다룰 질문입니다.
비판자들의 주장부터 가장 강한 형태로 정리하겠습니다. 무신론 진영의 대표적 논객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의 신은 질투하고 편애하며, 자기 백성이 아닌 이들의 몰살을 직접 지시한 존재다. 현대의 어떤 국가가 같은 일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쟁 범죄라 부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했다는 이유로 다르게 평가한다면,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 편들기다. 더구나 이 본문들은 역사 속에서 정복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실제로 사용돼 왔다. 이 지적은 진지하고, 마지막 문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로 짚어야 할 것은 본문이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여호수아 10장 40절은 이스라엘이 그 땅 전부를 쳐서 숨 쉬는 자를 다 진멸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3장 1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직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사기 1장에는 이미 진멸됐다던 도시들에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같은 책 안에서 모순되는 기록을 편집자가 알아채지 못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대 근동의 전쟁 기록을 보면 이유가 드러납니다. 당시 승전 기록은 과장된 총력전 표현을 관용구처럼 사용했습니다. 이집트의 메르넵타 왕이 남긴 비문은 이스라엘이 씨가 마르도록 황폐해졌다고 새겨 놓았지만, 그 뒤로도 이스라엘은 수백 년을 존속했습니다. 승리를 압도적으로 묘사하는 정형화된 문체였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의 진멸 표현도 같은 문학적 관습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는 성경을 변호하려고 만들어 낸 해석이 아니라, 고대 문헌을 다루는 학계의 일반적인 독법입니다.
두 번째는 심판의 기준입니다. 이 전쟁은 혈통을 겨냥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5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땅의 회복이 사백 년 뒤에야 이루어질 것이라 말씀하시며, 그 이유로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다고 밝히십니다. 사백 년의 유예 기간이 명시된 것입니다. 실제로 여리고의 라합은 이스라엘 편에 서서 살아남았고, 기브온 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인종이 기준이었다면 이들이 살아남을 길은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같은 잣대의 적용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같은 죄에 빠졌을 때 똑같이 심판받는 과정을 훨씬 더 길게 기록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무너졌고, 성경은 그 원인을 그들 자신의 죄로 명시합니다. 편애하는 신이라면 자기 백성의 멸망을 이렇게 상세히 기록으로 남길 이유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적용의 한계가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명령은 특정 시대, 특정 땅, 특정 상황에 주어진 일회적 명령이며 반복 가능한 규범으로 제시된 적이 없습니다. 신약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칼을 뽑은 제자를 제지하셨고(마태복음 26:52), 사도들은 로마 제국 안에서 무기 없이 복음을 전하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근거로 오늘의 폭력을 정당화한 역사는 성경의 오용이며, 교회는 그 오용을 변호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끊어 내야 합니다.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여호수아서의 진멸 표현은 고대 전쟁 기록의 과장 어법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혈통이 아니라 죄였고, 그 심판에는 사백 년의 유예와 귀순의 길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오래 참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시편 103:8). 우리가 불편하게 느끼는 그 심판의 기록조차, 사백 년을 기다리신 분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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