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서명됐습니다. 오늘로 73년입니다. 그 3년의 전쟁 한복판에서 한국 교회가 군대 안에 만들어 낸 제도가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군종, 곧 군대 안에서 장병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성직자 제도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록에 따르면 그 첫걸음은 전쟁 이전이었습니다. 1948년 9월 15일, 이화여자고등학교 교목이던 정달빈이 해군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의 초청으로 해군 중위로 임관했습니다. 한 사람이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제도가 된 것은 전쟁이 터진 뒤였습니다. 1950년 9월 18일, 한국 그리스도교계는 군종 제도 창설 추진 위원회를 조직합니다. 서울이 아직 인민군 치하에 있고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 있던 시기입니다. 이튿날인 9월 19일,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이 전쟁은 무기의 싸움만이 아니라 사상의 싸움이므로 장병들에게 정신적 계몽이 필요하고, 유엔군처럼 신앙의 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였습니다.
한 번의 면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9월 25일, 캐럴과 쇼 두 사람이 다시 대통령을 찾아갑니다. 이번에는 조건을 스스로 제시했습니다. 옷과 식량 같은 병참은 군이 맡되, 군종에게 들어가는 경비는 각 교단이 부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곳간이 바닥난 전시에, 요구가 아니라 부담을 자청한 제안이었습니다.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신분은 대통령의 의견에 따라 현역 군인이 아닌 문관으로 정해졌습니다.
이후 절차는 빠르게 이어졌습니다. 1950년 12월 4일 해군본부에 군목실이 설치됐고, 12월 21일에는 각 부대에 군종을 초빙하라는 명령이 내려갔습니다. 해를 넘겨 1951년 2월 7일, 육군본부 인사국에 담당 부서가 생기면서 육군 군종이 공식 출범합니다. 이때 입대한 개신교와 천주교 성직자는 30여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계급도 보수도 없는 촉탁 신분으로 전선에 들어갔습니다. 공군 군종은 1952년 3월 30일에 시작됐습니다.
기록에는 남지 않은 장면들이 있습니다. 후퇴하는 대열을 따라 걷고, 야전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지키고, 이름 모를 병사의 무덤 앞에서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총을 들지 않은 채 총성 속으로 들어간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기록에 남았습니다.
균형 있게 볼 대목도 있습니다. 초기 군종은 사실상 기독교 중심으로 출발했습니다. 불교가 군종 제도에 참여한 것은 1968년 9월, 원불교는 2007년 7월입니다. 이 시차를 두고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였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제기돼 왔습니다. 다만 창설 당시 국가가 예산을 대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용을 스스로 지겠다고 나선 쪽이 기독교였다는 사실 또한 함께 기록돼 있습니다. 평가는 갈리지만, 사실은 양쪽 모두 사실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편 23:4). 73년 전 오늘 총성은 멎었지만 이 땅은 아직 정전 상태입니다. 지금도 60만 명 가까운 청년이 그 경계선을 지키고 있고, 그들 곁에는 여전히 총 대신 성경을 든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유산은 그 자리를 비우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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