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현봉학, 흥남부두를 열게 한 간청

루카 · 2026.07.25

모레인 7월 27일은 6·25 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3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전쟁에는 총을 들지 않고도 수만 명의 목숨을 건진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이자 통역관이었던 현봉학입니다.

현봉학은 1922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현원국은 함흥 영생고등여학교의 교목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 신애균은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함흥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고, 해방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50년 3월 귀국한 직후 전쟁을 맞았습니다.

국군 해병대에서 문관으로 일하던 그는 1950년 10월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의 통역을 맡았고, 곧 민사부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해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함경남도 흥남에서 철수를 서둘렀습니다. 문제는 부두를 가득 메운 피란민이었습니다. 군은 병력과 장비를 먼저 실어야 했고, 민간인 수송은 상부 지시 없이 현장 지휘관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현봉학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북쪽이 다시 공산 치하로 들어가면 기독교인을 비롯한 주민들이 어떤 일을 당할지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알몬드 소장을 찾아가 민간인을 함께 데려가 달라고 거듭 간청했습니다. 에드워드 포니 대령과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결국 군은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란민을 배에 태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흥남을 빠져나온 피란민은 9만 명이 넘습니다. 훗날 그를 두고 한국의 쉰들러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배는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입니다. 정원이 60명이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어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는 배였습니다. 그런데 레너드 라루 선장은 12월 22일 밤부터 이튿날까지 약 1만 4천 명을 태웠습니다. 배는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라루 선장은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물을 수 있었고,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영화 국제시장의 첫 장면 때문에 현봉학과 라루 선장이 부두에서 마주 선 것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지만, 현봉학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떠나기 전날 다른 배로 이미 흥남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극적인 각색보다 기록된 사실이 더 무겁습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그 배들이 떠날 수 있었습니다.

현봉학은 전쟁 후 미국에서 병리학자로 일했고, 200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4년 국가보훈처는 그를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고, 2016년 옛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터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잠언 24:11).

정전 73주년을 앞두고 우리가 이어받을 유산은 이것입니다. 신앙은 감정이 아니라 결정으로 드러나며, 그 결정은 대개 남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내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