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윌버포스, 사흘 전에 들은 승리 소식

루카 · 2026.07.24

1833년 7월 26일, 영국 의회가 노예제 폐지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 소식을 병상에서 들은 한 노정치인은 사흘 뒤 새벽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 생애의 절반을 그 한 가지 일에 쓴 사람입니다.

윌버포스는 1759년 8월 24일 영국 요크셔의 킹스턴 어폰 헐에서 부유한 상인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스물한 살에 고향 헐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이후 45년간 의원으로 일했습니다. 재산이 있었고 말솜씨도 좋았습니다. 그대로 살았다면 편안한 정치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전환점은 1785년, 스물여섯 살 때였습니다. 유럽 여행 중 옛 스승 아이작 밀너와 신약성경을 함께 읽으며 회심했습니다. 회심 직후 그는 정계를 떠나 목회의 길로 갈까 고민했습니다. 이때 그를 붙든 사람이 존 뉴턴입니다. 노예선 선장이었다가 회심해 목사가 된 인물,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자입니다. 뉴턴은 하나님이 그를 정치의 자리에 세우셨다며 그 자리를 지키라고 권했습니다.

그가 택한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노예무역 폐지와 사회의 도덕 개혁입니다. 당시 영국 경제에서 노예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고, 그래서 그의 싸움은 곧 국가의 돈줄과 부딪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클래펌이라는 런던 남쪽 마을에 모여 살던 복음주의 신자들, 이른바 클래펌 파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이들은 증언을 모으고, 설탕 불매 운동을 벌이고, 서명을 받고, 인쇄물을 뿌렸습니다. 오늘날의 시민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이었습니다.

결과는 더뎠습니다. 법안은 거듭 부결됐습니다. 그는 십수 년에 걸쳐 같은 법안을 다시 내고 또 냈습니다. 1807년, 마침내 노예무역 금지법이 찬성 283표 대 반대 16표로 통과됐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사고파는 무역을 막은 것이지, 이미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풀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시 노예제 자체의 폐지를 향해 나아갔고, 거기서 26년이 더 걸렸습니다.

1833년 7월 26일, 대영제국 전역의 노예를 해방하는 법안이 하원 3차 독회를 통과했습니다. 병중이던 윌버포스는 그 소식을 듣고 기뻐했고, 7월 29일 새벽 세상을 떠났습니다. 법은 이듬해 시행됐습니다.

그의 생애를 신앙의 승리로만 그리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노예제 폐지에는 산업 구조의 변화와 국익 계산도 함께 작용했다는 평가가 있고, 그가 노동운동을 제약하는 법안에 찬성한 일로 비판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남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살아서 결말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에 인생 전부를 걸었고, 실제로 결말을 사흘 앞두고 눈을 감았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 이 이야기가 증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앙은 개인의 마음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제도를 향해 걸어 나갑니다. 그리고 그 걸음은 대개 한 세대 안에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유산은 승리의 순간이 아니라, 결말을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을 오늘 시작하는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