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분노의 포도, 빼앗긴 자의 존엄

루카 · 2026.07.23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땅을 잃고 일자리를 찾아 떠난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출간 당시 여러 주에서 금서로 지정되고 불태워질 만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늘 청년 고용 통계를 다룬 김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정면으로 그린 이 고전을 기독교 세계관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 짚어 봅니다.

작품은 1939년 출간됐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저자 존 스타인벡은 1902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1968년 세상을 떠났고, 196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배경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입니다. 오클라호마 일대를 덮친 극심한 가뭄과 모래폭풍, 그리고 농업 기계화로 소작농들이 땅에서 밀려났습니다. 소설은 그렇게 쫓겨난 조드 일가가 낡은 트럭에 짐을 싣고 일자리가 있다는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여정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도착한 곳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넘쳐나는 구직자와 바닥까지 내려간 품삯이었습니다.

제목부터 성경에서 왔습니다. 남북전쟁기 북군 군가로 널리 불린 공화국 전투찬가에 나오는 표현으로, 1861년 줄리아 워드 하우가 쓴 가사입니다. 그리고 그 가사에 담긴 진노의 포도 이미지는 요한계시록의 심판 장면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작품 곳곳에도 성경의 흔적이 뚜렷합니다. 고향을 떠나 광야 같은 길을 통과하는 구조는 출애굽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설교를 그만둔 전직 목회자가 일행과 동행하며 이야기의 중심에 놓입니다. 큰딸의 이름 로즈 오브 샤론은 영어 성경에서 아가서의 한 구절을 옮긴 표현입니다.

이 작품이 거둔 성취는 분명합니다. 스타인벡은 가난을 통계나 구호가 아니라 얼굴로 보여 줍니다. 소설이 끝까지 붙잡는 것은 굶주림 자체가 아니라 존엄입니다. 조드 일가는 구걸하려고 길을 나선 것이 아니라 일하려고 나섰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이 작품의 성격을 압축합니다. 아기를 사산한 큰딸이 굶어 죽어 가는 낯선 남자에게 자기 젖을 물립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사람이 마지막 남은 것을 내어 주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납니다.

성경은 이 고발의 정당한 부분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말합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야고보서 5:4). 성경은 품꾼의 삯을 당일 해 지기 전에 주라고 명령합니다(신명기 24:14-15). 일한 사람의 몫을 힘으로 깎는 것은 성경이 반복해서 정죄하는 죄입니다. 이 지점에서 신자는 작품과 함께 분노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그어야 할 대목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문제를 정확히 짚었지만 해답은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작품이 도달하는 결론은 흩어진 개인들이 하나의 큰 존재로 합쳐진다는 각성이며, 설교를 그만둔 인물은 모든 사람의 영혼이 결국 하나라는 생각으로 옮겨 갑니다. 신을 향한 회개 대신 인간의 연대가 구원의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성경의 대답은 다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연대는 귀하지만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작품을 둘러싼 논쟁도 균형 있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농장주 측은 현지 실정이 왜곡됐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소설이 특정 계층을 악역으로 단순화했다는 비판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이 책이 금서로 지정되고 불태워진 사실은 그 고발이 실제로 아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한쪽 평가만 취해 읽을 작품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일하려는 마음이 있는데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그들이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90년 가까이 증언해 왔습니다. 다만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종적인 대답은 사람들의 각성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우리는 이 초청을 전하는 동시에, 품꾼의 삯이 정당하게 지급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도 손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