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남긴 말입니다. 엿새 뒤인 7월 29일은 그가 1949년, 40년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온 날입니다.
호머 베절릴 헐버트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다트머스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신학교에 다니던 중, 조선 정부가 미국에 교사 파견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습니다. 그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6년 7월 초, 스물세 살 때였습니다. 그해 9월 문을 연 육영공원은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관립 학교였고, 헐버트는 그곳에서 영어와 지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배웠습니다. 자기 돈으로 한국어 교사를 고용해 한글을 익혔고,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쓸 정도가 됐습니다. 그렇게 나온 책이 1889년의 사민필지입니다. 선비와 백성이 모두 알아야 한다는 뜻의 제목을 단 이 책은 순 한글로 쓰인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지식층은 한문을 썼고 한글을 낮춰 보았습니다. 외국인이 그 한글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교과서를 만든 것입니다. 그는 훗날 한글에 띄어쓰기를 도입하자고 권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삶이 교육에서 정치로 옮겨간 것은 나라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앞두고 그는 고종의 밀사로 미국에 건너가 루스벨트 행정부에 친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도왔고, 그해 7월 현지에서 일본의 불법성을 공개적으로 폭로했습니다. 이 일로 그는 사실상 한국에서 활동할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16년에는 뉴욕타임스에 글을 실어 을사늑약이 일본의 무력으로 강요된 것이며 황제가 서명하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광복이 왔습니다. 1949년 7월 29일, 여든여섯의 헐버트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 해군 함정을 타고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한 달 가까운 항해였습니다. 미국을 떠나며 기자에게 귀국 소감을 묻자 남긴 대답이 앞의 문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광복절 행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다가 도착 일주일 만인 8월 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는 8월 11일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추도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1897년 여섯 살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이 잠든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데려온 뒤 그 사람의 마음까지 그 땅에 두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헐버트는 조선에 잠시 머물다 떠난 손님이 아니라, 조선의 문자를 배우고 조선의 억울함을 대신 말하고 조선 땅에 묻히기를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국 미국을 등지지 않았지만, 자기 편의를 앞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우리가 이어가야 할 유산은 이것입니다. 이 나라의 자유는 이 땅 사람들만의 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남의 나라 일에 자기 생애를 걸었던 신앙인들의 몫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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