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신사참배 거부, 2천 명이 갇혔다

루카 · 2026.07.22

86년 전 오늘과 가까운 1940년 7월 16일, 경남 거창의 주남선 목사가 거창경찰서에 구속됐습니다. 죄목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거부를 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양형무소로 압송돼 광복 이틀 뒤인 1945년 8월 17일에야 풀려났습니다. 오늘은 신앙의 자유가 법으로 막혔던 시대에 그 자리를 지킨 한국 교회의 기록을 돌아봅니다.

신사참배는 일제가 자국의 신을 모신 시설에 절하도록 강요한 의식입니다. 일제는 1930년대에 대륙 침략을 재개하면서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곧 교회에까지 이를 확대했습니다. 명분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을 아는 신자들에게 이것은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면서 제도권 교회는 사실상 굴복했습니다.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서 저항은 개인과 소그룹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거부 운동의 중심인물로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안북도의 이기선, 경상남도의 한상동·이주원·주남선, 전라남도의 손양원, 함경남도의 이계실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강요하는 일제와 이를 결의한 제도권 교회를 함께 비판하면서, 신자들에게 거부를 권하고 거부한 이들끼리 결속을 다지는 운동을 폈습니다.

대가는 컸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이가 대략 2천여 명, 폐쇄된 교회가 200여 곳, 순교자가 5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숫자 뒤에는 고문과 옥사가 있었습니다. 하동 출신 조수옥 전도사는 스물여섯이던 1940년에 붙잡혀 평양형무소에서 4년 10개월 넘게 옥고를 치렀다고 생전에 거듭 증언했습니다. 1945년 8월 17일 평양형무소에서는 주남선, 한상동, 조수옥, 최덕지, 이기선 등이, 대구와 광주 등지에서도 갇혀 있던 이들이 함께 풀려났습니다. 교계에서는 일제가 8월 중순 기독교인을 대규모로 처형할 계획이었다는 선교사들의 증언도 전해집니다. 다만 이 부분은 증언에 근거한 기록이라는 점을 함께 밝혀 둡니다.

출옥한 이들은 교회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를 다시 세웠고, 이후 신학교 설립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다만 이 대목에는 평가가 갈립니다. 출옥성도들이 요구한 회개와 재건 원칙이 무너진 교회를 바로 세우려는 정당한 요구였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 과정의 갈등이 결국 교단 분열로 이어졌다는 아쉬움을 지적하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가 사라진 시대에 절하지 않기를 택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어떤 평가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다니엘 3:18).

건져 주시지 않더라도 절하지 않겠다는 이 고백이, 평양형무소의 감방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 대가 없이 드리는 예배는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고 지켜낸 자리 위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