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우주의 답이 42라면, 신은 없는가

루카 · 2026.07.21

영국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코믹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삶과 우주와 모든 것의 궁극적 해답을 "42"라는 숫자로 제시한다. 재치 있는 농담이지만, 그 밑에는 우주에 본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세계관이 깔려 있다. 대중문화의 고전이 된 이 작품을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책은 1978년 영국 BBC 라디오 드라마로 출발해 소설·게임·영화로 확장된 시리즈다. 초공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지구가 철거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평범한 지구인 아서 덴트가 외계인 친구와 함께 우주를 떠도는 여정을 그린다. 관료주의의 비효율, 맹목적 믿음, 기술 만능주의를 영국식 블랙 코미디로 비꼬며, IT 업계와 서브컬처 전반에 큰 영향을 남긴 작품이다. 저자 애덤스는 스스로를 "급진적 무신론자"라고 밝힌 인물이었다.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거대한 슈퍼컴퓨터가 750만 년을 계산한 끝에 내놓은 답이 "42"라는 대목이다. 문제는 정작 그 답에 대응하는 '질문'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주의 궁극적 의미를 찾아 헤맸는데, 손에 쥔 것은 맥락 없는 숫자 하나뿐이다. 이것은 목적 없는 우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결국 공허로 끝난다는, 무신론적 허무주의(우주와 삶에 본래 아무 의미도 없다고 보는 입장)를 압축한 농담이다.

또 하나 주목할 장면은 '바벨어'라는 상상 속 물고기를 이용한 신 존재 부정이다. 이 물고기는 귀에 넣으면 모든 언어를 통역해 주는데, 너무나 유용해서 우연히 진화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설정이다. 책은 이를 비틀어 이런 논리를 편다. 그렇게 완벽한 존재는 신이 설계했다는 증거인데, 신은 "증명은 믿음을 부정하므로 나는 나를 증명하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으니, 증거가 나온 순간 신은 자기 논리에 따라 사라진다는 것이다. 신은 "그 생각은 미처 못 했군" 하며 순식간에 소멸한다. 유신론과 설계 논증을 한 번에 조롱하는 이 장면은 이 책이 왜 무신론적 세계관의 대중적 교과서로 읽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농담들은 논증이라기보다 말장난에 가깝다. 바벨어 궤변의 전제부터 성경과 어긋난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증거 없는 맹신이 아니라, 증거에 근거한 신뢰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로마서 1:20). 오히려 성경은 피조 세계 자체가 창조주를 증언한다고 말한다. "증명하면 믿음이 무너진다"는 설정은 애덤스가 만든 허구일 뿐, 기독교의 실제 입장이 아니다. 무언가가 지나치게 정교하고 유용하다는 관찰이 우연을 의심하게 만든다면, 그것을 말장난 한 줄로 지워낼 수는 없다.

숫자 42의 공허함은 더 깊은 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창조주가 없다면 우주는 정말로 질문 없는 답, 의미 없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성경의 전도서를 떠올릴 만하다. 전도서의 저자도 해 아래 모든 것을 좇은 끝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고 탄식한다. 여기까지는 42의 세계관과 놀랍도록 닮았다. 그러나 전도서는 그 허무에서 멈추지 않고 결론에 이른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 12:13).

애덤스는 의미를 찾는 여정을 공허로 끝냈지만, 성경은 같은 공허를 통과해 창조주 앞으로 나아간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 1:16-17). 우주는 질문 없는 42가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지으신 분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대답이다. 이 책의 기발한 유머는 즐길 수 있다. 다만 그 웃음 아래 깔린 세계관을 분별하며 읽을 때,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믿는 바가 왜 더 견고한지를 확인하게 된다.